‘군함도’의 대탈출, 그 숭고하고 적극적인 저항의 의미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군함도>가 개봉했다. 총제작비 270억 원의 대작이다. 이 정도 규모의 영화는 흥행에 위해가 되는 요소들은 최소화하면서, 역사적 상흔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진중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여기에 쟁쟁한 배우들을 멀티 캐스팅한 만큼, 각 인물들 간에 안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수백만 명의 동시대 관객들에게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군함도>가 이러한 난제들에 성공하였는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정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우선 영화는 강제징용의 역사를 재현하는데 성공하고 있으며, 강력한 서사로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각 인물들의 개성을 십분 살리고 있으며, 특히 아역 캐릭터의 비중이 높은 것이 인상적이다. 영화 <군함도>는 참혹한 역사를 고발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민족적 분노를 응집시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보다는 조선인 내부를 성찰하려는 시각을 견지한다.



◆ 강제징용의 역사에 대한 최초의 재현

영화는 실제 군함도의 2/3에 해당되는 초대형 세트로 지옥 같은 군함도를 재현한다. 군함도는 나가사키 남쪽 해상의 축구장 2개 넓이의 인공섬이다. 1890년에 해저탄광 개발을 위해 인공섬이 만들어지고 도시 시설들이 들어섰다. 1916년에는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가 만들어졌고, 유곽 등 유흥시설이 자리 잡았다. 인구가 5,300명으로, 도쿄보다 9배나 높은 인구밀도를 보였다. 군함도는 파도가 높아 접안이 쉽지 않은 고립된 섬으로, 탄광은 물론이고 섬 전체가 미쓰비시사 소유였다.

노동자들은 지하 1000m 깊이의 막장에서 탄을 캤다. 덥고 습한데다, 수시로 가스가 분출되는 막장에서 작업하는 것은 극도로 힘들었다. 초기에는 높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유인했지만, 태평양 전쟁이후 부족한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강제동원 하였다. 일본인 노동자들과 조선인 노동자들의 대우가 달랐으며, 가장 힘들고 열악한 갱도에 조선인들이 투입되었다. 일하다 죽고, 맞아 죽고, 탈출하다가 죽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800여명의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 중 공식적으로 사망한 인원만 134명이다.



그동안 군함도는 문헌이나, 르포, 소설 등을 통해 고발되어왔지만, 강제징용의 참상을 대중영화를 통해 조명한 것은 <군함도>가 처음이다. 강제징용은 일본군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인권유린이지만,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져왔다. 일본은 조선인 강제동원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으며, 강제동원의 역사를 지우려한다. 2015년에 군함도가 세계유산에 등재될 때, ‘각 시설의 전체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권고를 일본정부가 받아들인다는 단서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등재 후 일본정부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게 하는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군함도를 관광지로 홍보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함도를 소재로 한 영화의 개봉으로 전 국민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군함도>는 강제징용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복원하고 재구성한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극영화만이 할 수 있는 실감나는 재현을 통해 관객들에게 몰입의 경험을 선사한다. 예컨대 숨이 턱턱 막히는 좁은 갱도와 수시로 가스가 분출되어 무너지는 막장의 공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보여준다. 사방이 높은 파도로 둘러싸인 거대한 해상 감옥과 다름없는 폐쇄공포가 느껴진다. 영화는 공간에 대한 감각만으로도 역사적 재현에 다가선다.



◆ 세 축으로 진행되는 서사

영화 <군함도>는 1945년 전쟁의 막바지에 몰린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나려는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영화는 강제노역을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에 존재한 적이 없는 대탈출을 구성해낸다. 그곳에서 숨진 억울한 넋들을 위로하기 위한 영화적 제의이자,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담기 위한 기획이다.

영화의 서사는 크게 세 축으로 진행된다. 첫째, 서울에서 악단장을 하다 공장 사무직 자리를 알아봐주겠다는 경찰간부의 말을 믿고 일본행에 오른 이강옥(황정민)과 딸 소희(김수안)가 강제로 군함도에 배치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고도의 생존술을 구사한다. 둘째, 종로깡패 최칠성(소지섭)은 탄광에서 맞닥뜨린 악랄한 조선인 노무계장과 대립하며, 군함도 유곽으로 흘러들어온 오말년(이정현)과 극한의 상황에서 연정을 나눈다. 셋째, 군함도 안에서 조선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존경받는 독립운동가 윤학철(이경영)을 탈출시키기 위해 잠입한 미군 특수부대 소속 박무영(송중기)은 탈출 작전을 수행하다가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된다.



세 축의 서사는 장르적 보편성을 따라 흐르다가 어느 순간 예상을 벗어난다. 만약 윤학철이 영화 끝까지 민족지도자로 남고, 박무영이 그를 탈출시키려다 다른 사람들도 탈출시키는 서사를 따랐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일본과 조선 사이의 민족적 대립만 존재하고, 조선 내부에는 아무런 분열도 없는 서사로, 이른바 ‘국뽕’ 영화가 된다.

하지만 <군함도>는 이러한 구도를 버리고, 윤학철의 위선을 폭로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며 일본인들에게 굴종과 타협을 하며 살아왔던 이강옥이나 오말년 같은 인물에게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의 면모를 부여한다. 여기에는 기층민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려는 류승완 감독의 관점이 녹아 있다. 즉 민족사관이 아닌 민중 사관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가장 취약한 존재이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은 소희의 부릅뜬 눈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 조선인 부역자와 제국의 통치성

영화 <군함도>는 껄끄러운 문제를 발화한다. 바로 조선인 부역자의 존재이다. 영화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고통을 보여주지만, 민족의 구도로 선악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인을 통해 조선인들을 통치하였다.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 동원하는 데는 조선인 면장과 조선인 포주가 있었고,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관리한 것은 조선인 노무계장이었다. 또한 명망 있는 조선인 인텔리를 내세워 조선인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운다. 이러한 구조에서 조선인은 조선인과 싸운다. 최칠성은 조선인 노무계장과 싸우고, 박무영은 누구를 믿어야 할지를 두고 다른 사람들과 대립한다. 조선인들은 “조선 놈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는 소리를 해가며 서로를 혐오한다. 제국이 분열을 통해 식민지를 통치하는 방식이다.

혹자는 조선인 부역자를 부각하는 것이 일제의 만행을 희석시키고 일본에게 변명의 빌미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일제의 사과와 배상이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 조선인 대 가해자 일본인’의 구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로는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조선인 포주’ 등 조선인 가해자가 언급되는 순간 취약하게 무너진다.



그런데 조선인 부역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들은 식민통치를 가능하게 한 도구였으며, 식민통치는 강제에 의해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회유와 동화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히려 조선인 부역자의 존재를 아는 것은 식민통치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며, 한국 사회 내부의 친일청산을 끌어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러한 조선인 부역자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모순을 일본 대 조선이라는 민족의 대결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계급과 민족의 모순이 결합된 형태로 파악하는 틀이 필요하다.

군함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침략전쟁의 주체인 정부와 군부, 그리고 자본이 하나의 세력으로 결합되어 있다. 정부와 군부가 강제동원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을 조달하고, 자본인 미쓰비시사가 이들을 착취해 석탄과 기계 등 군수품을 조달한다. 군함도 전체를 미쓰비시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회사의 전일적인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연금보험이 형식상 주어졌으며, 식비와 기숙사비가 월급에서 공제되는 형태였다. 즉 노예나 다름없는 노동이었지만, 근대적인 노무관리를 표방한 자본주의적 착취이었다.

혹자는 강제동원의 역사가 서려있는 군함도가 유네스코 근대유적지로 등재된 것을 기막혀한다. 그러나 강제동원 역사는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을 이끈 탄광산업’이라는 표제와 모순되지 않는다. 근대화는 매끈하고 세련되고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침략전쟁과 자본주의적 착취를 통해 이루어졌다. 석탄 채굴을 위해 바다위에 인공섬을 만들고 도시를 건설하고 강제노역을 시킨 것이야말로 ‘근대화의 폭력’을 그대로 말해준다.



◆ 대탈출, 적극적인 저항

이러한 근대적 착취의 구조 하에서 영화가 구성해낸 대탈출이 무엇인지를 곱씹을만하다. 탈출을 감행하기 전 조선인들은 회의를 갖는다. 이때 일본과 협상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다. 한쪽은 회사를 믿고 협조하자고 하고, 한쪽은 회사가 우리를 모두 죽일 것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파업을 결정하기 위해 모인 노동조합의 회의처럼 보인다. 탈출은 파업과 다르지 않다. 개인적인 탈출시도가 모두 죽음으로 귀결된 상황에서, 수백 명의 집단적인 탈출을 감행하는 것은 굉장한 결단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살면 성공하는 것”이라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부상자와 아이들 먼저 석탄선으로 보내는 장면은 영화가 시작된 뒤 처음으로 정적인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이다. 장애를 지닌 남성이 나지막이 노래를 불러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장면은 숭고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평화의 순간도 잠시,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석탄선으로 몰려드는 장면은 흡사 폭동처럼 보인다. 소작쟁의나 노동쟁의로 시작된 단체행동이 폭동처럼 화하는 경우는 많다.



여기서 욱일기를 찢어 사다리를 세우는 장면은 상징적이지만, 반드시 ‘반일’ 이라는 민족감정의 표출로 읽을 필요는 없다. 자신을 억압해온 제국과 자본의 지배를 넘기 위해, 이들은 억압의 상징이었던 욱일기를 찢어 생존의 밧줄로 삼는다.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이 아니라, 바리케이드를 넘어 탈출하는 것. 흔히 탈주는 패배자의 행위이자 소극적인 저항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역사의 폭압에 짓눌린 평범한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한 탈출은 가장 적극적인 저항이 된다. 도망노예가 노예제를 붕괴시키고, 탈주자들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듯이.

2017년 여름 극장에는 두 개의 대탈출이 걸려있다. <덩케르크>는 승리의 역사가 아닌 탈출의 역사를 숭고하게 그린다. 누구도 그들을 패잔병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군함도> 역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쳤던 이들의 탈출을 고귀한 승리로 그린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살면 성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억눌린 자들이여, 도망쳐 살아남으라.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군함도>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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