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예외 없이 공평하게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류승완 감독의 영화 <군함도>에 대해 흑백으로 가를 만큼 명확한 의견을 갖고 있지 않다. 덤으로 말한다면 흑백으로 가를 만큼 단순한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 더 씹어보고 이야기를 풀 생각이었는데, 아주 신경 쓰이는 아래 기사를 보았다.

<무비톡톡> '군함도' 역사왜곡? 팩션에 왜 이렇게 예민할까(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70729104919516)

우선 가장 신경 쓰이는 건 팩션이라는 단어이다. 팩션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알리바이로서 들이밀어지는 것일까?

없는 단어는 아니다. 한국어로 구글링하면 위키의 다음 정의가 걸린다.

"팩션(Faction)이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새로운 시나리오를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를 가리킨다."



하지만 영어로 faction을 검색하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당파를 의미하는 faction이 먼저 걸리고 팩트 + 픽션은 그 다음이다. 사용빈도도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며 최근 뉴스에서는 거의 걸리지 않는다. 그게 당연한 것이 이는 잠시 유행했던 조어로 그렇게까지 쓸모 있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단어가 더 자주 쓰이는 것은 역사를 다룬 픽션에 대한 관점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실존인물을 다룬 실화 소재의 이야기를 ‘정통 역사물’로 보고 나머지는 보다 가벼운 무언가로 본다. 하지만 정작 역사소설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전쟁과 평화>, <삼총사>, <쿠오바디스>, <아이반호>, <두 도시 이야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작품들을 보라. 이들은 팩션인가?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이상한 소리를 해도 대충 넘겨도 되는 가벼운 이야기인가? 조금만 더 생각해도 참 무의미한 생각이란 걸 알 수 있다. 실존인물이 주인공이건, 허구의 인물이 주인공이건 작품은 모두 동등한 취급을 받는 게 정상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사의 첫 문장 역시 마찬가지로 신경이 쓰인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2시간 동안 누릴 즐거움을 위해 만든 영화에 역사왜곡 논란의 불을 지핀다는 것은 ‘이건 조금 아니지 않느냐’라는 얘기가 나오기 충분하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도 자주 사용되는 알리바이다. 같은 형식의 알리바이로는 ‘코미디는 코미디일 뿐이다’ 또는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가 있다. 보통 검열과 비판으로부터 개별 작품들을 보호해주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데, 왜 이 표현이 얼마나 모욕적인지 모르는 것일까? 자신의 작품이 소비되는 몇 분 또는 몇 시간 동안 소비자를 즐겁게 하다가 완벽하게 잊히길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군함도> 역시 2시간의 오락만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2시간의 즐거움이라는 목표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역사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 역시 분명 있었다. 이 영화가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관객들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따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기껏 ‘영화 하나 때문에 왜 그렇게 예민해?’라고 묻는다면 그건 정말 <군함도>라는 영화를 모욕하는 것이 아닐까?

‘액션 영화’로 제한해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음악을 빌려온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를 보자. 스파게티 웨스턴이다. 이 영화로 역사 공부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역사를 담고 있느냐와 별도로 이 작품은 19세기 미국 역사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액션 영화라고 해서 그냥 액션만 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군함도>는 역사를 다루는 한 편의 영화로서 알리바이나 면죄부 없이 공평하게 비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영화란 말이다.

다큐멘터리와 실제 역사적 배경에서 허구의 인물들을 다루는 이야기는 다른 잣대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은 맞다. 우린 얼마든지 허구의 사건과 인물을 역사적 사실 속에 넣을 수 있다. 그건 이야기꾼의 자유이며 그걸 막는 법은 없다. 하지만 독자나 관객이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군함도>는 실제 역사에 상당히 과격한 허구를 추가한다. 군함도에 갇힌 중요한 정치가를 구출하기 위해 잠입한 한국인 OSS 요원이 나가사키 핵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군함도의 수많은 조선인들을 구출한다는 것이다. 군함도엔 두 가지 2차 세계대전 장르가 공존한다. 포로수용소 탈출물과 집단수용소 이야기다. 이는 이미 선례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분명 과거의 시대배경을 융통성 있게 적용한 영화들이 있다. 주로 포로수용소 영화들이 그렇다. <대탈주>처럼 실제사건에 바탕을 둔 영화도 있지만 <제17포로수용소>처럼 개연성 있는 픽션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어정쩡하게 주저앉은 계획을 픽션을 통해 구현한 작품도 있다. 예를 들어 <9인의 독수리>는 글라이더를 만들어 포로수용소에 갇힌 과학자를 구출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는 콜디츠 코크라는, 실제로 포로수용소 안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탈출에 사용되지 못한 글라이더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 정도야 다들 인정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군함도>는 단순한 포로수용소 탈출 이야기가 될 수가 없다. 영화가 택한 배경은 역사적 개연성이 있는 허구의 공간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곳이며 그곳에서 일어난 비극은 구체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위해 이 역사에 허구의 인물과 이야기를 넣는 건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여기에 대단위 탈출을 넣어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돌린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허구의 수감자들이 독일군들을 제압하고 대규모 탈출을 벌이는 액션물을 찍었다고 생각해보자. 그 영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그 영화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왜 <군함도>는 예외여야 할까? 옳고 그름을 떠나 이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기획단계에서 예상해야 했던 일이다.

<군함도>가 비판을 받는 또다른 이유는 역사관 이슈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작품 자체만큼이나 감독의 인터뷰와도 관련되어 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인 모두를 착한 사람들로만 묘사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군함도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나쁜 일본인’만 있었던 게 아니고, ‘좋은 조선인’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이걸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종류의 착취 시스템에 사로잡힌 맨 밑바닥 사람들을 직접 괴롭히는 건 그들과 직접 연결된 바로 윗사람들이나 동료들이다. 이 경우는 친일파 조선인이거나 그 하수인이다. 그리고 일본이란 국가에도 다양한 일본인들이 살았을 것이다. 일반론으로서 이 말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일반론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배경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일본인들을 등장시킨 역사 소재 영화가 이미 몇 주 전에 나왔다. 이준익 감독의 <박열>이 그 작품이다. 거의 모든 일본인들이 극단적인 악역으로 나오는 <군함도>와 비교해보면 오히려 이게 더 나아간 작품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여기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박열>은 전혀 다른 틀 안에서 이 이야기를 했다. 실존인물을 다루었고 사실에 충실했으며 이야기 틀 안에서는 그 다양한 사람들의 존재가 당연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조선인과 일본인’은 이 이야기에서 충분한 설득력의 기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군함도>가 다루는 이야기에서는 그럴만한 충분한 여유가 없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 상당수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이 재료들을 갖고 만들어진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에 대한 분노는 흔해빠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들을 군함도에 몰아넣으면 초점이 흐려져 버린다. 허구의 공포와 고통 때문에 군함도 사람들이 겪었던 진짜 공포와 고통이 약화되고 변형되고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들, 특히 소지섭 캐릭터는 후반의 액션신을 위해 쓸데없이 근육질이 되는데, 군함도에서 그 체력을 도대체 어떻게 유지했던 것인가?) 그러면서 영화는 여전히 울분으로 가득 차 있는데, 영화를 보다보면 이 울분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군함도>를 보면서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공식에 따른 천만영화 대작을 만들려는 시도 자체에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을 적당히 만족시키고 위험한 것을 건드리지 않는 오락영화를 만들려는 시도가 위험한 역사와 만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이 영화를 만든 나름 잔뼈 굵은 베테랑들이 개봉 전까지 이 위험 요소를 읽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런 시도의 문제점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군함도>스틸컷]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