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을 갖고 본 ‘열정 같은 소리’·‘바디 액츄얼리’·‘뜨거운 사이다’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신규프로그램 경쟁으로 분주한 하반기 방송가에서 뜻밖의 다크호스는 변방의 케이블 채널이었다. 패션, 뷰티 전문 채널 이미지에 갇혀 있던 온스타일이 13년 만에 대대적 개편을 단행하며 내놓은 다양한 신규프로그램들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간판만 새로 바꾼 채 정작 내용이나 출연진은 진부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메이저 방송사 예능들과는 달리, 신선한 소재와 얼굴들을 적극 발굴한 전략이 주효했다. 특히 온스타일이 자신 있게 내세운 세 편의 대표 프로그램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청춘들의 현실 직시 토크쇼 <열정 같은 소리>, 여성 이슈 분석 토크쇼 <뜨거운 사이다>, 여성건강 리얼리티쇼 <바디 액츄얼리>, 이 신규 예능 삼각편대는 중년남성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주류 예능들이 따라잡지 못하는 트렌디한 감각으로 도발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물론 이 ‘변방성’의 참신함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가는 향후 제작진의 역량에 달려있겠지만, 적어도 그 덕에 방송의 화두가 한층 다채로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삼분지계>의 평론가들도 그 시도를 격려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해봤다.



◆ <열정 같은 소리>, 귀담아 들어야 할 청춘의 소리

“가르치는 것 말고는 대화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열정 같은 소리> 2화 예고에서 제리 케이가 말했다. 흠칫 놀라 첫 회를 보는 동안 내가 했던 생각들을 되짚어 봤다. 입으로 뱉지는 않았을지언정 떠올리기는 했다. 반말 하지 말지. 말 좀 끊지 말지. 장문복에게 왜 꼰대짓들이야? ‘짠내 배틀’을 거부하지만 녹화 내내 많이들 했잖아? 어림잡아 무려 열 번이 넘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2화 주제는 ‘막돼먹은 꼰대씨’였다. 자신이 꼰대 일 수도 있어서 무섭다는 최서윤, 꼰대라는 소리 많이 들어 봤다는 제리 케이, 스스로 꼰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는 이랑과 진행자 허지웅. 꼰대를 중장년층으로 국한시키지 않는, ‘너는 악, 나는 선’으로 편을 가르지 않는 열린 자세가 좋았다.



고백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나는 청춘들이 질색하는 ‘꼰대’ 소속이다. <열정 같은 소리>에 나온 ‘꼰대력 테스트’ 기준으로 봐도 꼰대가 맞다. 청춘의 소리보다는 ‘개저씨’들의 소리를 더 많이 듣고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꼰대로 계속 살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놓칠세라 청춘들의 소리에 집중한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를 꼽아볼까? 인상 찌푸릴 일이 너무 많아서, 절로 패인 미간 주름 개선을 위해 ‘홧김비용’ 1만9,000원을 썼다는 이랑. 보톡스가 안전하냐는 질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전쟁 같은 하루하루인지라 안전여부까지는 생각 못했다고 답했다. 수저 계급론, 열정페이, 갑질논란, 그간 너무나 많이 다뤄진, 어쩌면 빤한 얘기들 속에서 이랑의 솔직한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기사로 도배되는 건 ‘뇌섹녀’ 심소영과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장문복뿐. 어이없지만 이게 청춘들이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다.

방송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 <바디 액츄얼리>, 방송이 이제야 상식을 따라잡았다

<바디 액츄얼리> 도입부에서 MC 사유리는 하나의 실험을 진행한다. 거리의 시민들에게 성교육 인형을 보여주고 몸의 부위별 명칭을 묻는 실험이다. 머리, 가슴, 배 등 거침없이 대답을 이어가던 이들은 여성 성기 부위 질문에 이르자 갑자기 말을 잃는다. 이번엔 또 다른 MC 정수영이 거리로 나선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프로그램 런칭을 홍보하며 기념 선물로 생리대를 내밀자 대부분 당황하는 기색이다. 여성의 몸을 둘러싼 터부를 시민들의 즉각적인 반응으로 증명한 실험이다.

<바디 액츄얼리>는 이 ‘강요당한 침묵’을 벗어나는 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 주제가 ‘생리’인 것도, 그것이 ‘터부’의 어원과 관련된,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억압당해온 여성의 신체 현상이라는 점에서 꽤 영리한 선택이다. 이 주제를 ‘공개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데 집중한 전략도 효과적이었다. 길거리 실험, 버스킹, 생리컵 착용 공개 체험은 물론이고 여성이 평생 사용하는 생리대 개수, 월간 생리혈의 양 등의 시각적 정보로 꽉 채워진 첫 회는, 생리대 광고에서마저 ‘그날’로 에둘러야 하는 답답함을 해소한다.



사실 <바디 액츄얼리>의 실험과 내용 자체가 그리 새롭다거나 파격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2006년도에 30대 싱글 여성 고병희(고현정)가 “내 안에 자궁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살았다”며 사람 북적이는 카페에서 자궁단면모형을 꺼내 당당하게 “병희 것, 사랑해”라고 적어 화제가 됐던 <여우야 뭐하니>라는 드라마가 MBC에서 방영된 역사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 액츄얼리>가 참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이후 정체되었거나 오히려 퇴보해 온 방송의 여성 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2000년대 후반부터 남성집단 MC 체제 예능 범람, 걸그룹의 치열한 생존경쟁 등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사물화가 가속화된 방송가에서 <바디 액츄얼리>는 그 시도만으로도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당연한 걸 당당하게!”라는 슬로건이 평범한듯하면서도 비범하게 다가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방송이 이제야 ‘상식’을 따라잡고 있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선영 herland@naver.com



◆ <뜨거운 사이다>, 더 많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하여

제목이 주는 인상과 달리 <뜨거운 사이다>는 좀처럼 ‘사이다’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첫 방송에서 몸이 조금 덜 풀린 듯한 모습도 보였던 패널들은 두 번째 방송에선 작정한 듯 더 적극적으로 이슈를 파고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속이 시원해지는 일은 별로 없다. <뜨거운 사이다>가 다루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착취 사례들은 암담할 정도로 심각하고 만연해서, 발언의 수위를 높인다고 해서 ‘사이다’처럼 청량한 기분이 들지도 않거니와 그 높은 수위의 발언들도 금세 현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몰카 범죄자들에게 벌금을 상한선 없이 부과하자.”라는 의견이 나오면 한 쪽에서 조용히 “한국의 법 체계 상 어렵다.”라는 지적이 나오고, “영화 촬영 현장에서 사전 협의 없는 노출을 요구하면 거부해야 하지 않나.”라고 말하면 “권력자인 감독이 강요하는데 무명의 배우 입장에서 쉽게 거절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론이 나온다. “이런 이야기를 방송에서 할 수 있다니.”라는 해방감은, 바로 다음 순간 “이렇게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를 왜 이제껏 방송에서 할 수 없었던 걸까.”라는 본질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역설적으로 이런 답답함이야말로 <뜨거운 사이다>의 존재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요소다. 이토록 기본적인 여성인권의 문제를 여성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하는 것조차, 코미디언, 아나운서, 배우, 저널리스트, CEO, 변호사 등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패널들이 모여야 간신히 가능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껏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확보되고 존중받는 일이 그만큼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여성들이 직접 다양한 이슈를 치열하게 다루는 <뜨거운 사이다>의 존재가 더 소중하다. 비록 사이다 같은 속 시원한 대화를 나눌 일은 적고 답답한 현실 앞에서 진짜 사이다 캔을 따서 들이켜야 하는 날들이 오래 계속 되더라도, 쉬 지치지 않고 뜨겁게 세상을 논하는 일을 계속 해주기를. 우리에겐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이 필요하니까.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온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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