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원작과 비교해 꼼꼼히 따져보니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릴러이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은퇴한 살인자의 독백을 따라가면서, 새롭게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을 담는다. 원작은 1인칭 시점을 따라가면서,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점을 극대화시켜 반전을 꾀한다. 즉 이 모든 것이 혼돈스러운 기억의 산물이었다고 밝히면서, 어느 것이 망상이고 어느 것이 실제 일어난 사건인지 모호하게 뒤섞는다. 여기에 소설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학적 가치와 해석의 여지는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뭉텅 달아난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원작이 지닌 서늘하고 날카로운 면모를 탈각하고, 훨씬 통속적이고 평이한 세계에 안착한다. 물론 대중영화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이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각색의 과정에서 살인자의 노골적인 자기변명이 깃들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남성 주체가 자아 보호를 위해 끌어들이는 무의식적 장치들을 살펴보는 것이 꽤 흥미롭다.



◆ 살인자의 자의식 미화

원작에서 살인자는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살인기술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 반복해서 살인한다. 소설은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그의 독백을 듣는다. 부도덕한 존재의 내면의 기술(記述)을 듣는 것은 순문학적인 차원에서 독특한 묘미가 있다. 그는 일체의 변명이나 범인(凡人)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겠다는 마음이 없다. 그런 자의 독백도 들을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그러나 영화로 옮겨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그는 어떤 배우에 의해 몸을 가진 존재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관객은 배우의 몸을 통해 구현된 인물을 3인칭 적으로 바라보면서, 그에게 어떤 인상과 감정을 품게 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관객이 가급적 그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극에 몰입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설경구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연기를 펼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 영화는 몇 가지 서사적 장치를 덧붙인다. 그가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폭력가장을 죽인 후 죽어 마땅한 자들을 죽여 왔다는 것. 덕분에 그는 조금은 관객들의 이해를 얻는 존재가 된다. 영화에서 김병수(설경구)는 태주(김남길)에게 소리친다. “나는 너처럼 이유 없는 살인을 하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만 죽여 왔다.” 이때 태주가 반문한다. “쓰레기라는 걸 누가 결정하지? 그러니 우린 둘 다 똑같은 살인자새끼다” 맞는 말이다. 김병수의 살인에 다소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영화라는 장르에 맞춘 장치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살인자의 내면에서 자기 합리화를 위해 동원한 무의식적 변명처럼 보인다.



그뿐이 아니다. 원작에 비해 영화 속 태주는 훨씬 생생하고 비열한 악한으로 묘사되어 있다. 원작의 태주는 모호하게 그려져 있으며, 결국 김병수의 망상이 빚어낸 존재임이 밝혀진다. 원작에서 태주는 김병수를 쫓던 경찰이었고, 태주에 대한 온갖 의심들은 김병수가 자신의 범행을 투사한 결과이다. 즉 최근의 살인사건들이 수십 년 만에 살인의 감각이 되살아난 김병수의 짓이며, 이러한 각성이 김병수의 독백을 따라 그의 망상 속을 거닐던 독자에게 강한 임팩트를 주는 것이 원작의 묘미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현실각성을 통한 윤리적 성찰을 폐기한다. 그 대신 살인자의 독백을 추인하면서, 그가 반신반의했던 태주에 대한 의심을 확증시킨다. 즉 김병수는 비록 알츠하이머병으로 기억이 오락가락하지만 그의 의심이 옳았고, 나쁜 놈은 태주라는 것을 확정짓는다. 원작의 문제의식은 달아난 채, 영화는 딸을 지키려는 늙고 병든 김병수와 젊고 사악한 김병수의 대결이 된다. 관객들은 김병수가 살인자라는 점은 잊어버리고, 딸을 지키기 위해 젊은이와 육탄전을 벌이는 ‘늙은 아버지’로 그를 바라보며 응원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도덕의 아전인수가 숨어있다.



◆ ‘창녀’와 성녀에 둘러싸여 위로받는 남성자아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병수에게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라는 도덕의 방패를 부여한다. 이를 위해 영화는 돈독하고 절대적인 부녀관계를 그린다. 원작에서 딸은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이고, 딸은 자신이 입양되었음을 알고 난 뒤 친밀감 없이 김병수를 대한다. 소설은 반전을 통해 딸이 김병수의 망상이 빚은 존재임을 밝힌다. 김병수는 요양보호사를 딸로 착각하는데, 그가 사라지자 태주가 죽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를 죽인 것은 김병수였음이 강하게 암시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딸은 망상의 산물도 아니며, 대단히 친밀한 존재이다. 반전을 통해 친딸이 아님이 밝혀지지만, 김병수가 딸로 키운 존재임은 분명하다. 김병수는 딸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딸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영화는 모든 상황이 끝난 뒤에도 김병수의 수발을 드는 은희(김설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녀관계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그린다. 확고한 부녀관계는 김병수에게 절대적 명분을 안긴다. 즉 그가 어떤 사람이든 ‘아버지 김병수’는 도덕적 명분과 딸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



영화에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조연들이 등장한다. 친구인 안소장(오달수)의 존재는 김병수가 누군가에게 친구일 수 있는 인간적인 인물로 보이게 한다. 또한 시 강좌에서 만난 조연주(황석정)는 김병수를 따라다니는데, 그도 김병수를 나름 매력 있는 존재로 느끼게 만든다. 수녀가 된 김병수의 누나는 김병수의 첫 살인과 그의 병을 안타까워한다. 영화는 김병수의 누나가 오래전에 죽었고, 수녀는 김병수의 망상임을 보여준다. 요컨대 영화는 이들 세 명의 조연을 끼워 넣음으로써, 김병수를 동네 친구와 좋아하는 여자와 사랑하는 누나가 있는 근사한 존재로 그린다. 고립된 남성자아가 자기위안을 위해 상상하는 관계들이 아닌가.

여기에서 조연주와 수녀 누나를 좀 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조연주는 김병수에게 천박하게 애정을 구걸하다 죽는다. 불행한 가정사를 함께 겪은 누나는 김병수의 머릿속에서 수녀가 되었다. 남성의 자아 존중감을 높이기 위해 상상된 두 여인, 나를 욕망하는 여자와 나를 위해 기도하는 누나. 전형적인 ‘창녀’와 성녀의 구도이다. 김병수가 17년 만에 떠올리는 마지막 살인의 대상은 바람피운 아내였다. 쓰레기 같은 사람만 죽인다는 그가 아내를 죽인다. 즉 ‘창녀’는 처벌당한다. 아내의 간통으로 낳은 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빠”라고 부르는 어린 딸의 목소리에 그는 은희를 딸로 받아들인다. 딸은 ‘창녀’가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 바람피운 아내를 죽이고 유혹받는 딸을 단속하는 남자의 서사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가장 서늘한 장면은 김병수가 은희를 다른 사람으로 오인하여 목 조르는 장면이다. 그 순간 김병수는 자신의 몸에 남은 살인의 감각을 느낀다. 그리고 최근의 살인사건들이 자신이 한 짓은 아닌지, 자신의 몸에 남은 습관이 진짜 은희를 헤치지는 않을지 의심하게 된다. ‘주체의 분열’이라는 원작의 문제의식이 살아있는 장면이다.

이때 딸은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목을 조르는 행위는 딸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행위를 벗어난다. 그것은 딸의 얼굴 위로 덧씌워진 ‘창녀’를 처벌하려는 무의식적 행위였다. 즉 17년 전 간통한 아내를 처벌하던 남성자아의 복귀이다. 영화는 이 문제의식을 더 밀고 나가지 않고, 또 다른 살인자 태주를 은희 옆에 등장시킨다. 김병수는 은희 곁에서 태주를 떼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유를 알려달라는 딸에게 김병수는 점점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인 반응을 보인다.



아버지와 ‘딸의 남자’. 은희를 둘러싼 두 남성의 대립구도가 만들어진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단속이 흉포하게 느껴질 무렵, 영화는 태주에게 모든 악을 불어넣고 김병수에게 연민을 안기며 두 남자의 대립구도를 일방적인 선악의 구도로 만든다. 즉 나쁜 놈의 유혹으로부터 딸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몸부림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이로써 자신의 악을 돌아보는 살인자의 회한은 간데없고, ‘바람피운 아내를 죽이고, 유혹받는 딸을 단속하는’ 아버지의 서사만 남는다. 대단히 폭력적인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현현이 아닐 수 없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김병수의 살인들은 어느새 면죄되고, 태주의 악마성만 부각된다. 하지만 김병수와 태주의 무의식적 욕망은 겹쳐있다. 은희를 목 조르는 장면에 이어 나타난 태주가 결국 은희를 죽이려하고, 김병수가 죽이고픈 조연주를 결국 태주가 죽이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태주도 가정폭력을 겪었다는 점에서 김병수와 비슷하다. 어쩌면 태주는 김병수의 젊은 판본이거나 또 다른 자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터널을 통과한 김병수가 태주를 보는 것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어찌 보든 영화의 최종적 악인은 태주인데, 영화는 그가 악인이 된 원인으로 모성을 소환한다. 영화는 클라이맥스에서 태주의 흉측한 상흔을 드러낸다. 태주는 그 상흔이 엄마에 의해 생긴 거라며, “여자들은 다 똑같애” 라 말한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무고한 여자들을 죽이는 태주가 엄마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으며, ‘충족되지 못한 모성’이 남성주체로 하여금 여성에 대한 원한과 혐오를 갖게 했다고 영화가 설파하는 것이다. 대단한 ‘여혐의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원작의 문제의식을 탈각한 채, 여성을 처벌하고 단속하려는 남성자아의 무의식과 모성결핍을 악의 근원으로 설정하려는 ‘여혐의 철학’을 품는다. 주제의 측면에서 결코 지지할 수 없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살인자의 기억법>은 영화로서 일정한 가치를 지닌다. 이는 순전히 설경구의 연기 덕분이다. 설경구의 기념비적인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 설경구는 각색의 난망함과 조악함을 온전히 몸으로 메우며, 서사와 인물에 설득력을 불어넣는다. 설경구가 아니었던들 초췌함과 공허함, 퀭한 눈매와 황폐해진 인격 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으랴. 앞으로 <살인자의 기억법>은 영화에서 배우의 힘이 얼마나 막대한지 알려주는 교본으로 회자될 것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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