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드 리버’ 감독이 자기검열이라는 도구를 활용하는 방식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경향신문의 [영화 ‘브이아이피’ 여성 혐오 논란, 제작자 및 영화평론가에게 듣는다]의 기사를 읽다가 맨 위에 실린 최재원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대표의 주옥 같은 글을 읽고 매 문장마다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욕구에 시달렸다. 하지만 나 혼자 재미있으라고 그 장황한 글을 여기에 다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마지막 문단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원문보기: http://v.media.daum.net/v/20170903212642789

“우려스러운 것은 영화인들의 자기검열이다. 앞으로는 표현 수위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누군가 농담처럼 ‘이제 디즈니영화나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 당장 다음 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왜 자기검열이 우려스러운 것인가? 만약 여러분이 머릿속에서 퐁퐁 솟아나는 히틀러와 괴벨스에 대한 정치 농담들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제3제국의 풍자시인이라면 자기 검열은 분명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것과 전혀 상관없다. 몇백만의 관객들이 봐야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는 상업영화에 적나라한 고문 살인 장면과 그에 대한 무신경한 묘사가 맞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 표현의 자유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강한 묘사를 하고 극단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독자와 관객의 거부감을 예상하며 당연히 그 예상까지 작품에 반영한다. 그것도 예상하지 못한다면 그냥 둔감한 예술가의 나쁜 작품이 나올 뿐이다.



그리고 예술가에게 자기검열은 필수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욕망은 저열하며 예술가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자신의 작품을 포르노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검열은 당연하다. 이는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술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작품은 대부분 지루하기 짝이 없다. 어떤 계산 없이 자유분방하게 작품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짓말쟁이다. 적절한 자기 검열의 작업은 더 나은 작품을 만든다.

좋은 영화에서 자기 검열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적당한 예를 찾다가 곧 개봉하는 테일러 셰리던의 <윈드 리버> 생각이 났다. 셰리던은 <시카리오>와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가로, 그가 직접 감독한 <윈드 리버>는 앞의 두 영화와 함께 현대 배경 서부극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서부극답게 매우 마초적인 영화이며, 여기에 대해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브이아이피>가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거부했던 자기 검열에 충실하다. 그 결과가 어떤지 한 번 볼까?



일단 <윈드 리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범죄 자체이다. 영화는 집단 성폭행을 당한 젊은 여자가 눈 덮인 겨울 벌판을 달아나다가 목숨을 잃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것이 이야기의 시작점이며 셰리던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이를 잊지 않는다. 나중에 개성이 강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개인사가 그려지지만 영화는 이 사건을 주인공의 이야기를 위한 도구로 쓰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 역시 당연히 사건의 종결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강간을 포르노화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엑기스 장면’이 나올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윈드 리버>는 범행 당시를 상당히 꼼꼼하게 재현하지만 정작 성폭행 장면은 다루지 않는다. <브이아이피>의 각본을 쓰고 감독한 박훈정은 그 장면을 빼면 어떻게 범인의 잔인함과 사건의 처참함을 묘사할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셰리던은 그 따위 걱정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 그는 범행장면을 그리는 대신 죽은 사람에게 생생한 캐릭터를 부여하고 그 인물의 죽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며 강간 비주얼의 도움 없이 피해자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하며 연민한다.



영화는 강간범들을 뭔가 재미있고 독특한 인물, 그러니까 클래식을 듣는 싸이코패스처럼 그리려는 욕망을 사전에 차단한다. 이 영화의 강간범들은 그냥 역겹고 혐오스럽다. 영화는 그들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 동기가 배경이 되는 와이오밍 원주민 보호구역의 환경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설명하지만 그들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으며 클래식 음악도 안 깐다.

영화는 범죄자를 제대로 처벌한다. 내가 종종하는 말이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 있는 부분을 더 공들여 만들기 마련이다. 강간 살인 장면이 길고 자세하지만 처벌이 밋밋하다면 당연히 만든 사람의 관심은 전자에 쏠려 있다. 이런 사람들도 훌륭한 이야기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꾼은 자기 검열의 과정을 통해 일부러 후자의 비중을 높일 것이다. 물론 <윈드 리버>의 처벌은 실제로 일어난 범죄에 대한 대가로는 한참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는 끝난 뒤에도 고구마를 먹은 것 같은 갑갑함 따위는 남기지 않으며 처벌 장면은 원시적이지만 온전한 정의의 실현처럼 보인다. 피해자의 가족들을 적절하게 위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건 당연하고.



마지막으로 <윈드 리버>는 남탕 영화가 아니다. 얼마든지 남탕 영화가 될 수 있었지만 셰리던은 FBI 요원 제인 배너를 중요한 인물로 등장시켜 균형을 잡는다. 이 캐릭터의 활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의 여지가 남아있다. 배너는 경험이 부족할 뿐 훌륭한 수사관이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배경이 되는 와이오밍 주 원주민 보호구역의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인물이다. 이 인물이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을 위해 동원된 것이 얼마나 긍정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강간 살해를 남자들만의 드라마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대신, 한 명의 여성으로서 진지하게 분노하고 슬퍼하는 수사관을 등장시켜 영화의 중요한 일부로 삼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남탕 영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며, 분노하는 정의로운 남자주인공의 나르시시즘 과잉이 될 가능성을 상당히 줄여준다.

이것들은 다 자기 검열의 과정과 그 결과물이다. 한마디로 셰리던은 수위가 세고 멋져 보이는 영화 대신 도덕적이고 깊이 있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이 자기 검열의 도구를 최대한 이용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는 시간과 노력과 고민이 들어간다. 이를 귀찮다고 여기고 이에 대한 요구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당연하다. 물론 그들은 그냥 공감능력이 없고 게으를 뿐이다. 그 게으름뱅이들이 '이제 디즈니영화나 만들어야 할 것 같다'라고 한다고? 뼈를 깎는 자기 검열 없이 <겨울왕국>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다고 진짜로 믿는 건가? 착각은 자유이긴 하지만 남의 돈으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면 주변 사람들이 먼저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윈드 리버><브이아이피>스틸컷, 메이킹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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