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설경구 아니면 이런 강렬함 가능했을까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기 전 예고영상을 봤던 관객이라면 병수 역을 연기한 설경구의 그 얼굴을 찡긋거리는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법하다. 그 장면 하나가 영화의 대부분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딸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살인자고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의 앞에 또 다른 연쇄살인범이지만 경찰인 태주(김남길)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살인범이 딸을 노리고 있다는 걸 직감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살인 그 자체보다 이 상황이 더 공포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평범한 딸 은희(설현)가 모르는 아버지가 연쇄살인범이라는 비밀이 우선 그렇다. 폭력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더 끔찍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에게 경각심을 준다. 자칫 기억을 다 잃어버리면 누군가를 죽였던 살인습관만 남아버릴 수 있고, 그 대상이 딸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한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을 믿지 않는 대신 그의 일상을 은희가 준 녹음기에 또 노트북에 일기로 기록한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연쇄살인범으로 인해 병수는 망상과 실제 사이에서 혼돈에 빠져버린다. 태주가 진짜 연쇄살인범인지, 아니면 자신이 누군가를 또 죽이고 대신 태주를 연쇄살인범으로 몰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



김영하 원작소설이 가진 스토리의 촘촘함 덕분이겠지만, 이 영화는 연쇄살인으로 대변되는 폭력과 기억의 문제를 정교하게 짜 넣어 상상이상의 몰입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폭력의 문제는 꽤 많은 상징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테면 병수가 연쇄살인범이 되는 과정이 그렇다. 그는 끔찍한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겪다 결국은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이 폭력의 세계로 들어온다. 그에게 살인은 살인이 아니고 죽어 마땅한 이들을 죽이는 일이 된다.

우리네 현대사를 이 안에 투영해 들여다보면 마치 그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해야만 했던 정당화를 주장하곤 하는 국가의 여러 잠재적 폭력들을 떠올리게 된다.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 그것은 폭력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그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이제 기억이 그것을 지워내려 한다. 무수히 많이 벌어졌던 사건사고들이 계속 반복해 터지게 된 건 그 망각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망각은 폭력 그 자체만큼 무서운 기제다.

그런데 그 폭력은 돌고 돌아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망각을 통해 폭력이 반복되었지만, 그 망각 때문에 이제는 자기 가족까지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폭력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됐고, 그래서 그 아버지의 폭력을 처단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 살인은 다시 빙빙 돌아 그를 자신의 아버지의 위치로 되돌린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 이야기를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우리네 사회에서의 폭력이 어째서 여성들에게 더 집중되었는가를 발견해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태주의 범행대상은 항상 여성이고, 병수가 살인을 저지른 근원을 들여다보면 여성 같은 약자들에게 행해지는 폭력이 그 이유다. 그래서 딸 은희를 두고 벌어지는 두 살인자들의 대결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거나 여성을 보호하려는 그 두 개의 힘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통해 이만한 상징과 은유를 환기시킨다는 건 역시 작품이 가진 밀도가 그만큼 단단하다는 걸 확인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건 다름 아닌 배우 설경구다. 그는 너무 끔찍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살인범이지만 관객들을 그의 심정에 빠뜨릴 정도로 강렬한 몰입의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 살인자가 보여주는 마지막 진심이 관객의 마음을 찌른다. 그의 찡긋 찡긋하는 그 표정에 이끌려 영화관을 찾았다면 그건 제대로 선택한 것이다. 그의 연기가 이 영화를 이토록 강렬하게 만든 것이니.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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