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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배우 나문희와 같은 시대를 살게 돼 참 다행이다
기사입력 :[ 2017-09-28 15:52 ]


‘아이 캔 스피크’ 나문희의 인생 캐릭터 Top 3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평단과 대중의 찬사 속에 흥행 순항 중이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그 한결같은 호평의 핵심에 주연 배우 나문희의 위대한 연기가 있다는 데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벌써부터 올해 영화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은 모조리 나문희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돌아보면 나문희의 연기는 늘 뛰어났다. 하지만 그 연기력을 마음껏 발산할 ‘인생 캐릭터’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한국 대중문화계가 여배우, 특히 노년의 여배우에게 맡기는 역할이란 대부분 뻔하기 때문이다.

<삼분지계>는 그 뻔한 역할들의 바다 속에서 배우 나문희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는 세 작품을 골라보았다. 정석희 평론가는 나문희에게 전국적 인기를 가져다 준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김선영과 이승한 평론가는 나문희와의 협업으로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냈던 작가 노희경의 두 작품 <디어 마이 프렌즈>와 <굿바이 솔로>를 추천했다. <아이 캔 스피크>의 나옥분과 닮은 듯, 또 새롭고 입체적인 얼굴들이 여기 있다.



◆ <거침없이 하이킥>의 문희- 에너지 넘치는 국민 할머니

무려 10년 전 작품이지만 다시 봐도 여전히 흥미로운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하지만 할머니 역할의 나문희 씨 없이 국민드라마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답은 단연코 NO! 구색 맞추기 식의 기존 노인 캐스팅과는 달리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노부부가 중심인물이었으니까. 첫 회부터 큰아들 준하(정준하)와 충격적인 먹방을 선보이는가 하면 길에서 주운 거대한 소파를 들고 무단횡단을 하다가 적발돼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본 적이 없던 새로운 모자 관계의 탄생이었다. 똑 닮은 뽀글머리에 죽이 척척 잘 맞는, 에너지 넘치던 그 어머니와 아들이 지금도 눈물 나게 그립다.



뿐만 아니라 화제의 유행어 ‘호박고구마’를 낳은 큰며느리 박해미와의 대결구도도 색달랐다. 며느리에게 늘 당하는 시어머니라니! 가끔 작심하고 도발을 해보지만 여지없이 패하지 않았던가. 이웃인 개성댁(이수나)에게 며느리 험담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으나 나중에 개성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헛헛해하던 나문희 여사. 그러고 보니 ‘싹퉁바가지’도 그립네 그려.

남편 이순재(이순재) 원장네 식모였다가 결혼했다는 설정도 신선했다. 그로인해 20여 년 동안 이어진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노골적인 무시. 그럼에도 정 많고, 어려운 사람 도울 줄 알고, 마음 아파하고. 밝고 긍정적인 성정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나옥분 여사와 많이 비슷하다. 나옥분 여사나 <거침없이 하이킥>의 나문희 여사나 연기자 나문희 씨만이 가능한, 나문희 표 캐릭터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게 돼 참 다행이다.

방송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 <디어 마이 프렌즈>의 정아 - 이토록 숭고한 독립선언

정아(나문희)가 집을 나가던 날은 시댁 제삿날이었다. 꼰대 남편 석균(신구)과 결혼한 뒤 평생을 가족 뒷바라지에 바쳤던 정아는 72세가 되어서야 지긋지긋한 아내, 며느리, 엄마의 짐을 벗어던지고 자신만을 위한 물건을 챙긴 채 집을 나선다. 카메라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 프레임 바깥 좌측에는 남성들만 절을 올리는 제사 장면을 놓고 화면 우측에는 절반 정도 가려진 가족사진을 배치한다. 그 가운데서 문을 열고 나오는 정아의 모습은 이것이 단순한 가출이 아니라 그녀의 전 생애를 옭아맸던 가부장적 가족제도로부터의 탈출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정아는 나문희라는 배우가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소비되어 왔던 모습과 가장 가까우면서 동시에 가장 멀리 나간 캐릭터다. 그래서 ‘시동생 여섯을 다 건사하고 시부모 똥오줌까지 받아낸’ 전형적인 한국 여성 수난사로서의 정아의 삶은 꼭 나문희가 아닌 그 누구여도 상관없지만, “배낭을 짊어지고 노브라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채 길 위에서 죽겠다”는 한 노년 여성 자아찾기의 제2막부터는 오직 나문희만이 할 수 있는 연기로 전개된다. 특유의 꾹꾹 눌러 담아온 감정을 분출시키는 연기에서 나문희라는 배우가 지닌 폭발력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는다. <아이 캔 스피크> 클라이막스 법정신의 그 가공할 폭발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오열하기 전에 미리 tvN <디어 마이 프렌즈>로 마음을 단련해보시라.

칼럼니스트 김선영 herland@naver.com



◆ <굿바이 솔로>의 미영 할머니 - 연기의 본질은 리액션에 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2017)의 하이라이트 대목은 거의 나옥분(나문희)의 연설이 지닌 힘으로 전개된다. 나문희의 위엄 있는 발성과 또박또박한 발음은 영화관 좌석에 앉은 관객들마저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드는 힘을 지녀서, 새삼 배우에게 목소리라는 것이 얼마나 중한 덕목인지 실감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만약 배우에게서 목소리를 앗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노희경 작가의 2006년작 KBS <굿바이 솔로>에서 나문희가 맡은 배역인 미영 할머니는 세상의 아픔과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스스로 말하는 것을 거부한 인물로, 목에 자그마한 화이트보드를 매고 필담을 나누는 것으로 말을 대신하는 인물이다. 16부작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 목소리를 내어 하는 대사가 세 마디 가량에 그칠 만큼 대사가 적은 미영 할머니는, 그 대사의 빈자리를 상대의 말을 듣고 필담을 적어내릴 때의 표정과 몸짓으로 극복해야 하는 어려운 연기적 과제가 주어진 배역이었다. 이런 쉽지 않은 설정에도 미영 할머니는 극 전체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한다. 고단한 시간을 방황 중인 극중 청춘들이 미영 할머니에게 제 이야기를 털어 놓을 때마다, 나문희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한 눈빛으로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극의 정서를 따뜻하게 유지했다.



2006년 씨네21 김혜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문희는 대사가 없음에도 아주 구체적인 대사가 있는 듯한 표정과 눈빛으로 연기하는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남의 말을 잘 귀기울여 들으면 대답이 되는 거예요. 내 대사가 없어도 상대방 대사가 나한테 말을 만들어주는 거죠” 이는 연기(Act)의 본질이 사실은 리액션(React)에 있다는 간단한 진리를 다시 증명하는 대답이었다. 주어진 상황에, 눈앞에서 연기하고 있는 상대 배우에, 자신에게 주어진 인물설정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인물은 살아 숨 쉬는 인물이 되기도 하고 틀에 박힌 인물이 되기도 한다.

가슴을 에는 대사를 쓰는 데 능한 마에스트로 노희경은 나문희에게 대사를 앗아감으로써 나문희가 가장 본질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줄 수 있도록 했고, 노희경의 오랜 동지인 나문희는 이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소화해냈다. <아이 캔 스피크>의 연설에 감동한 당신이라면, 말없이 천 마디 말을 전하는 <굿바이 솔로>의 미영 할머니도 만나볼 차례다.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MBC, tvN, KBS, 영화 <아이 캔 스피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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