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문 등 고대사 서술, 근〮현대 각국의 욕망으로 왜곡돼온 과정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학자가 과거에는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다. 현재 시각에서 만든 틀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과거를 선택적으로 가져와 그 틀에 맞춰 해석한다.

광개토왕비와 비문 1,775자 또한 세워진 414년 당시의 맥락과 의도로부터 분리된 채 풀이됐다. 고구려가 668년 멸망한 뒤 오랜 세월 잊혔던 광개토왕비가 역사의 무대에 다시 올려진 것은 1889년이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1883년에 입수한 묵본(墨本)을 해석한 책이 이 때 나왔다.

◆ 신묘년조, 문단 속에서 파악해야

널리 알려진 대로, 일본은 비문 중 신묘년조(條)에 주목했다. 신묘년조는 391년 사건을 서술한 다음 32자(한자 기준, 식별되지 않은 글자 포함)를 가리킨다.

<백잔 신라(百殘 新羅) 구시 속민(舊是 屬民) 유래 조공(由來 朝貢) 이(而) 왜(倭) 이(以) 신묘년(辛卯年) 래(來) 도해(渡海) 파 백잔(破 百殘) □□ □라(羅) 이위신민(以爲臣民)>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면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사료로 의미가 부여됐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야마토 조정이 4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주장이다.

<백잔(백제)과 신라는 본디 속민으로 원래 조공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 강점기 한국인 학자들과 뒤 이은 남한과 북한의 사학자들은 ‘쳐부순’ 주체를 고구려라고 여기는 등의 방식으로 문구를 해석함으로써 임나일본부설에 맞섰다. 예컨대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와서’로 시작하는 대목을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왔으므로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왜를) 쳐부수었다’는 식으로 풀이했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는 책 『만들어진 고대』에 실은 논문 「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에서 신묘년조 32자에 집착할 게 아니라 문맥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32자는 그 다음에 '이(以) 육년 병신(六年 丙申)'으로 시작되는 다음과 같은 광개토왕의 무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넣은 장치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에 6년 병신년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제를 토벌했다.

이와 관련한 상세한 내용은 아래 ‘[관련] 왕궁솔(王躬率)과 교견(敎遣)’에서 전한다.

저자는 나아가 이 문구가 왜(倭)의 실제 활동을 기록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주장한다. 한편 ‘임나’는 원래 가야 제국 중 한 맹주국의 별명이었고 가야 제국에 대해 고대 일본에서만 특수하게 사용되던 총칭이며 “따라서 ‘임나일본부’라는 기구의 통치 대상이나 명칭 자체도 그대로는 성립할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

◆ 광개토왕비를 세운 이유

광개토왕비는 비 자체로도 메시지를 담고 있다. 광개토왕비는 묘비(墓碑)도 아니고 묘지(墓誌)도 아니다. 묘비는 용이나 호랑이 머리를 얹은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진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광개토대왕비는 비신에 머리가 없다. 묘지는 무덤 안에 매장하는 작은 묘비로, 대개 네모꼴 판석 형태를 띤다.

비문의 구성 또한 비를 세운 취지를 드러낸다. 비문은 서론과 두 가지 내용을 담은 본론으로 이뤄졌다. 서론은 시조인 추모왕(鄒牟王)이 건국한 유래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고구려 왕가의 세계(世系)를 간략하게 서술했다. 제1본론은 광개토왕의 무훈(武勳)을, 제2본론은 광개토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330가에 대한 내용이다.

저자는 ‘장수왕은 왜 선왕의 공적을 무훈에만, 그것도 무훈의 일부에만 주로 할애했을까?’. ‘왜 장수왕은 수묘인(守墓人)에 그렇게 비중을 두어 서술했을까?’ 등의 의문을 제기한 뒤 당대의 맥락에서 광개토왕비를 세운 취지를 밝혀낸다.

◆ 현재의 욕망을 고대에 투영하지 말라

머리말에서 저자는 “역사에는 거리, 대립, 전망이 중요하다”는 J. 호이징거의 말을 인용한다. 호이징거는 『역사학의 성립』에서 이 말에 이어 “우리는 과거에서 우리 자신의 상황과 같은 것을 찾을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대립을, 완전히 다른 것을 찾는다”고 말했다. 이 말에 비추어볼 때 저자가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 2세로 태어나 자란 것은 근대에 대한 일본과 남북한의 역사 서술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배경이 됐으리라고 짐작된다.

저자는 일본이 근대국가로 외부와 내부에 자신을 알리기 위해 일본사를 쓰고 고대 역사를 만든 것처럼, 일본의 역사 서술에 대항해 한국이 만든 고대 역사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발해의 역사도 중국과 한국, 러시아가 제각각으로 서술하는 대상이다.

각국의 일반인들은 물론이요, 역사학자들도 아직도 고대 속에 현재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고대는 대부분 현재와 멀리 떨어져 있고 종종 단절돼 있으며 지금과 판이한 당대의 맥락 속에서 움직였다. 이성시 교수는 “나는 일본이나 한국, 북한을 불문하고 고대사 연구에는 1000년 이상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 하는 거리관(距離觀)이 없는 논의가 횡행되어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관련] 왕궁솔(王躬率)과 교견(敎遣)

신묘년조 32자를 푸는 실마리는 왕궁솔(王躬率)과 교견(敎遣)이다.

왕궁솔은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라는 뜻이고, 교견은 '군사를 보내'라는 뜻이다. 왕이 전투나 전쟁에 직접 나선 것은 명분이 뚜렷하거나 적이 막강하거나 하는 등의 이유가 있어서였다. 즉, 상대국이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거나, 왜가 갑자기 해당 지역에 쳐들어왔거나,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거나 하는 요인이 있었다.

다음 광개토왕비문에서 이를 직접 확인해보자.

ㅇ 교견
- 팔년 무술(八年 戊戌) 교견 편사(偏師) 관(觀) 백신토곡(帛愼土谷).
- 십년 경자(十年 庚子) 교견 보기(步騎) 오만(五萬) 왕구 신라(往救 新羅).
- 십칠년 정미(十七年 丁未) 교견 보기(步騎) 오만(五萬) □□□□□□□□ 왕사(王師) 사방합전(四方合戰) 참살탕진(斬煞蕩盡).

- 8년 무술(398년)에 군대를 변경의 백신토곡에 보내 살피게 하여
- 10년 경자(400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을 보내 가서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 17년 정미(407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마병 5만을 파견하여…합전하여 모조리 참살하였다.

ㅇ 왕궁솔
- 입년 경술(卄年 庚戌) 동부여(東夫餘) 구시(舊是) 추모왕(鄒牟王) 속민(屬民)
중반불공(中叛不貢) 왕궁솔 왕토(往討).
- 십사년 갑진(十四年 甲辰) 왜(倭) 불궤 침입(不軌 侵入) 대방계(帶方界) □□□□ 석성(石城) 연선(連船) □□□ 왕궁솔 □□ 종(從) 평양(平穰) 봉상(봉相).
- 백잔 신라(百殘 新羅) 구시 속민(舊是 屬民) 유래 조공(由來 朝貢) 이(而) 왜(倭) 이(以) 신묘년(辛卯年) 래(來) 도해(渡海) 파 백잔(破 百殘) □□ □라(羅) 이위신민(以爲臣民). 이(以) 육년 병신(六年 丙申) 왕궁솔 수군(水軍) 토벌(討伐) 잔국(殘國)
- 이십년 경술(410년)에 동부여는 옛날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이에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 십사년 갑진(404년)에 왜가 갑자기 대방 지역에 쳐들어왔다. 석성…배를 연결하고…왕이 몸소 거느리고…평양을 쳐서…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서 계속해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에 대응해 육년 병신(396년)에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

‘왕궁솔’의 모든 서술은 '이십년 경술'과 같이 시기로 시작했는데 이 대목에서만 왕이 군사행동에 직접 나서게 된 사유를 시기보다 앞세웠다. 그건 사유에 해당하는 32자가 길어서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smitten@naver.com

[책 정보]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만들어진 고대, 260쪽, 삼인 펴냄,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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