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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라더’에 마동석 원맨쇼만 있는 건 아니다
기사입력 :[ 2017-11-10 11:34 ]


‘부라더’, 가부장제의 뇌관을 터뜨려버리는 놀라운 파괴력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부라더>가 흥행 탄력을 받고 있다. 요즘 대세 마동석이 등장하는 코미디라거나 유쾌한 소동극이 훈훈한 가족화해로 마무리된다는 점이 흥행요소로 회자된다. 요컨대 무겁고 칙칙한 느와르나 사회 고발극에 질린 관객들이 오랜만에 머리를 비우고 가볍게 웃을 수 있는 가족 코미디를 만나 신선함을 느꼈다는 분석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부라더>를 이렇게만 평하는 것은 핵심을 빼고 칭찬하는 격이다. <부라더>는 가부장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텍스트로 가치를 지닌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 뇌관을 터뜨려버리는 파괴력이 있다.

<부라더>는 장유정 감독이 자신의 흥행 뮤지컬 <형제는 용감했다>를 영화로 옮긴 것으로, <김종욱 찾기>에 이은 두 번째 시도이다. 영화로 옮기면서 인물들의 설정이 조금 달라졌고, 뮤지컬에서 중요한 요소를 차지했던 춤과 노래를 대신해 캐릭터 코미디와 장소 캐스팅이 한몫을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바뀐 인물들의 설정과 안동 고택의 위엄이 주제를 더욱 부각시켰고, 마동석 이동휘 이하늬의 개성이 담긴 캐릭터 코미디가 참신한 유머로 작용했다. 깔깔 웃으며 보는 편은 아니지만, 반 박자 늦게 피시식 웃음이 터지는 리듬감이 나쁘지 않다.



◆ 유교적 가부장제의 본진으로 들어가 폭파시키는 영화

영화 <부라더>가 시작되면 안동 고택에서 정갈한 자세로 글자를 새기던 노인이 쓰러져 죽는다. 이어서 두 아들이 소개된다. 형 석봉(마동석)은 문화재 발굴을 꿈꾸는 학원 강사이고, 동생 주봉(이동휘)은 안동에 도로를 뚫으려는 건설회사 직원이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고향에 내려가던 형제가 마을 어귀에서 만난다. 그런데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 돌아가신 아버지나 고향에 대한 감정도 냉소적이다. 이들은 아예 고향이니 장례식이니 하는 것에 악감이 있는 듯, 티격태격 거리다가 급기야 싸운다.

영화 초반은 다소 산만하다. 이들이 맞닥뜨린 묘령의 여인 오로라(이하늬)의 아리송한 모습이나 종가에서 장례식을 준비하는 종친들의 모습, 거기에 3년 전 어머니 장례식을 포함해 언뜻 비치는 회상 장면들이 영화 <부라더>의 주제를 완전히 오해할 정도로 어수선하다. 예컨대 여자주인공을 현실감이 전혀 없는 과장된 캐릭터로 그린다거나, 유교적인 가부장제가 만개한 현장을 보여주는 장면들에서 반여성주의적인 영화라는 오해가 불거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곧 몇 가지 떡밥들이 회수되면서, 영화가 무엇을 타격하고 있는지 분명해진다. <부라더>는 그렇게도 대단하게 여기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본진이라 할 만한 안동 종가로 들어가, 그 허구적이고 억압적인 본질을 역설적으로 까발리는 영화이다.



뼈대 있는 가문의 종손이었던 노인의 두 아들은 제사니 장례니 하는 것에 진저리를 친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 산 사람이 고생하는 짓거리라는 생각에 “21세기에 이런 옷을 입고 싶냐?”며 삼베 옷 입기도 거부한다. 부엌에서 어른들이 전수하는 종가의 맛은 인터넷 레시피로 대체된 지 오래이다. 형제는 종손의 지위를 물려받지 않으려고 장례식만 끝나면 부리나케 올라갈 생각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중요한 미션이 생긴다. 형은 숨겨진 금불상을 찾고 싶고, 동생은 도로를 내는 일에 종친들의 동의를 얻고 싶다. 형은 친구들을 동원해 집을 뒤지며 보물찾기에 돌입하고, 동생은 갑자기 족보를 완벽 마스터 하며 종친들의 총애를 받는다. (뮤지컬에서 두 형제는 모두 백수였고, 형제가 유산으로 남겨진 로또를 찾기 위해 경쟁한다는 설정이었다. 원작에 비해 훨씬 심화된 풍자의 구도이다.)

이들이 벌이는 동상이몽의 소동극만으로도 종가니 유교적 전통이니 하는 것이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유물에 불과하며, 자본주의적 욕망에 의해 해체되거나 이용될 일만 남았음이 강력하게 시사된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 <부라더>는 이들의 부모에게 어떤 사연들이 있었는지 꺼내놓으며 유교적 가부장제에 대한 통렬한 일격을 가한다.



◆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 가부장제

<부라더>는 모두가 가부장제의 피해자였다는 기막힌 진실을 말한다. 종손이 될 거라며 특별대우를 받고 자란 형은 엄청난 부담을 느낀 탓에 “고아가 되는 것이 장래희망”이었다고 한다. 한편 형보다 총명했지만 차별 받았던 동생은 “형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단다. 종부로 평생 동안 그 많은 제사 음식을 만들고 차렸던 어머니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종친들에게 군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영화는 지금도 횡행하는 젊은 며느리(송상은)에 대한 당숙모의 타박을 예시로 보여주며, 어머니가 젊은 시절 어떤 핀잔과 눈총을 들으며 살았을지 짐작케 한다.

아버지 역시 어머니에게 종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가부장이었다. 어찌나 어머니를 무시했던지 어머니의 죽음을 아들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장례를 치러버렸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온 형제들은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의절해버린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고, 가족 간의 정도 모두 단절된 가부장제의 모순을 이정도만 비판해도 꽤나 신랄하다. 그런데 영화는 한걸음 더 들어간다. 영화는 몇 개의 굴곡을 넘어, 두 개의 비밀을 풀어놓는다.



첫째는 그렇게 태생적인 운명처럼 인식되던 종손이라는 굴레가 사실은 임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본래 종손이 아니었다. 종손이 되기를 거부하고 도망친 빈자리에 일가 중 가장 가난한 소년이 입양되었고, 그것이 아버지였다. 절대적이지도 않은 종손의 자리에 충성하느라 온가족의 인생이 저당 잡힌 꼴이다. 둘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비밀이다. 종가의 며느리로 평생을 일하다 늙은 어머니에게 치매가 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일체의 치료를 거부한다. 평생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탓에,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이 종부로서 우세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집안의 문을 닫아걸고 비밀에 붙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을 두 아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그들이 종손이라는 이름에 발목 잡히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는 뜻이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아버지 대화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치매로 점점 젊었을 때의 기억으로 돌아간 어머니는 “왜 놀러 못가게 해? 자꾸 밥만 하라고 하고” 라며 억울한 듯 따진다. 하기야, 어머니의 영혼이 얼마나 생기발랄한지 알고 난 관객들은 종부의 굴레가 얼마나 그를 옥죄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희미해진 기억으로 아버지에게 누구냐고 묻자 아버지는 “나는 이 집 종(奴) 이요”라고 말한다. 종손이라는 특별한 지위에서 가부장제의 수호자이자 기득권자처럼 보였던 아버지 역시 이 시스템에 붙들려 평생 종노릇을 해왔다는 자인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택한 종손의 자리를 끝까지 책임지고자 한다. 그리고 자식들은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의절을 감내한다.



◆ 제사는 문화재 보존차원에서 특별한 집안에서만 지내는 걸로

영화 <부라더>는 유교적 가부장제가 무엇을 희생시키며 존속해왔는지를 신랄하게 드러낸다. 평생 어머니를 부려먹던 종친들은 종부가 병이 나서 더 이상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자, 혀를 끌끌 차며 개탄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때도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침내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들은 어머니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어머니는 한 사람의 인격체가 아니라, 그냥 ‘종부’였기 때문이다. 왜 형제는 자신의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들 역시 종부 역할에 치어 시들어버린 기억 속 어머니와 눈앞의 싱그러운 육체를 지닌 사람을 매치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어머니를 희생물이 아닌 인격체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영화는 여자의 노동을 갈아 넣어 지탱되는 제사 문화의 폭력성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족보와 위신을 중시하는 문화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정을 얼마나 파탄내는지 보여준다. 또한 가부장제의 수혜자처럼 보였던 남자들도 저마다의 부담과 고통과 질투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종손은 종손이라 괴롭고, 장남은 장남이라 괴롭고, 차남은 차남이라 괴롭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실상은 속빈 강정처럼 허구적이며, 모든 구성원들을 피해자로 만드는 악습에 불과하다는 날선 결론을 기막히게 풍자해낸다.



이 와중에도 누가 종손의 자리를 떠맡을 것인지가 끊임없이 탐색된다. 미봉은 종손의 자리에 은근히 욕심을 내지만, 미봉의 처(손상은)는 종부의 자리를 떠맡지 않기 위해 남편을 잡도리한다. 이전 세대와 달리 아내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종친들 앞에서 묘한 허세를 떠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요즘 젊은 남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도 떠맡을 사람이 없는 종부의 자리는 없어져야 마땅하다. 영화는 해체 직전에 놓인 콩가루 집안의 ‘아사리 판’을 있는 대로 보여주고는 ‘천연기념물의 발견’이라는 장치를 통해 간신히 종가가 보존되는 결말을 보여준다. 그리고 맥거핀이었던 금불상의 존재도 보너스로 암시한다.

이런 결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래도 가족화해로 봉합된 해피엔딩이니, 유교적인 제사문화는 보존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할까. 별로 그렇게 생각되진 않는다. 이미 유교적인 제사문화의 허구적 실체는 완전히 까발려졌고, 그것의 잔류는 ‘천연기념물의 발견’만큼이나 희소한 것이어야 함을 암시한 것으로 읽힌다.

요컨대 유교적 가부장제의 본산 격인 안동 고택의 종가도 저러할진대, 뭣도 아닌 일반 가정이 무슨 제사문화를 지킨답시고 괴로워하느냐는 반문처럼 보인다. 이제 제사문화는 멸종위기의 천연기념물을 보호하는 것과 비슷한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하고, 제사는 금불상이 숨겨져 있을 정도로 유형적 무형적 유산이 있는 집안에서나 문화재 보존차원에서 지내는 것으로 갈음하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부라더>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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