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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잡는다’ 백윤식·성동일, 노인들만 위대하다고?
기사입력 :[ 2017-12-08 16:40 ]


‘반드시 잡는다’가 품은 젠더적 구도에 의아함 느낀 사람이라면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반드시 잡는다>는 웹툰 <아리동 라스트 카우보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범죄영화 <공모자들><기술자들>을 연출했던 김홍선 감독의 신작으로,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과 초로에 접어든 전직형사가 연쇄살인자를 잡는 이야기이다.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수사물인 만큼, 영화는 빠릿한 액션을 보여주지 않지만 더 현실감 있고 일상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느리지만 빡센 액션에 생활연기의 달인들이 펼치는 은근한 코미디도 곁들이니, 영화의 재미는 그만하면 합격점이다. 하지만 한계도 명백하다. 영화 <반드시 잡는다>는 소외된 노인에 대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내비치지만, 그러한 환기가 유효하게 이루어지는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영화가 사회적 약자로 지목하는 노인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계층에서 여성은 여전히 수동적인 존재에 머문다는 뚜렷한 문제점을 보인다.



◆ 30년 만에 되살아난 연쇄살인

영화 <반드시 잡는다>는 쇠락한 지방소도시의 전경을 비추며 시작된다. 곧이어 덕수(백윤기)를 보여준다. 낡은 저층 아파트 ‘아리 맨션’에 사는 독거노인이지만, 약간의 체조와 혈당체크로 아침을 열만큼 자기관리가 되는 인물이다. 그는 아리 멘션의 집주인이자 현역 열쇠수리공이다. 하지만 동네 평판은 좋지 못하다. 인색하고 괴팍해서 사람들과 마주치면 집세 닦달하기 바쁘고, 다른 사람 죽음 앞에서 “집값 떨어진다”는 소리나 하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변사자가 잇달아 발견되어 흉흉하던 차에, 세입자 최씨에게 쓴 소리를 한 다음날 최씨가 목을 맨 채 발견된다. “집세 닦달에 자살”이라는 뉴스가 뜨면서, 덕수는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나 오해다. 오히려 그 날 밤 두 사람은 훈훈한 술자리를 가졌더랬다. 전직 경찰이었다는 최씨는 동네의 변사자들이 살해된 것일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반신반의하는 덕수 앞에 최씨의 과거 동료 평달(성동일)이 나타나 연쇄살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30년 전 이 동네에서 사고사나 자살로 위장한 노인들의 죽음이 잇달아 일어나고, 이어서 젊은 여성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고. 지금 그 살인이 30년 만에 다시 시작된 거라고. 마침 또 윗층의 젊은 세입자 지은이 실종되자, 덕수는 평달과 함께 살인자를 잡기 위해 수사에 나선다.



여기서 질문. 왜 현직 경찰도 아닌 그들이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을 수사하는가. 영화는 평달의 입을 통해 두 가지 이유를 들려준다. 첫째, 생존자를 살리기 위해서 이고, 둘째, 사건해결의 유일한 적역이라는 것. 두 가지 이유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논리로, 영화의 주제와 한계를 모두 함축한다.

평달은 떠들썩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면, 납치된 지은이 범인 손에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익숙한 논리이다. 영화 <극비수사>에서도 보았듯이, 경찰의 수사가 피랍자의 생명보다 범인을 잡아 실적을 올리려는 것에 치중된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아는 바다. 더욱이 경찰 내부사정을 잘 아는 전직경찰의 말이니, 나름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덕수와 평달은 지은의 집에서 확실한 살인의 증거를 보고도 그대로 방치한 채, 공권력을 우회하여 직접 행동에 나서는데, 이러한 행동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물론 영화는 반전을 통해 이런 무리한 판단과 행위가 평달의 병적 집착과 정신 상태에서 기인한 것임을 내놓는다. 하지만 결국 평달의 노쇠한 정신과 병적 집착이 범인을 잡는데 일조했음을 보여주며, 영화가 이들의 판단을 추인한다. 이는 영화가 지향하는 노인에 대한 가치판단을 품고 있다.



◆ 노인은 어떤 존재인가.

“너는 이 동네를 잘 알고, 나는 그 놈을 잘 아니까”라는 평달의 말은 곱씹어볼만한다. 30년 만에 부활한 연쇄살인사건이지만, 당시 수사가 연쇄살인사건임을 증명하지도 못한 채 종결되었기 때문에, 공식 기록도 남아있지 못하다. 그래서 사건의 본질은 평달만 알고 있다. 즉 영화는 공식화되지 못한 암묵지적 지식과 그것의 담지자인 노인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요컨대 요즘 웬만한 지식은 인터넷에 있으며, 그러한 지식의 바다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정보력을 좌우한다. 과거 노인의 지식은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현재 검색능력이 떨어지는 노인은 지식 소외계층이다. 그런데 인터넷에도 없는 지식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오랜 세월동안 사람의 몸에 체화되거나 지역에 토착된 채 존재한다. 영화에서 쇠락한 노인인 평달만 아는 “놈에 대한 지식”과 토박이 덕수가 아는 ‘동네에 대한 잡스럽고 빠삭한 지식’ 등이 바로 암묵지이다. 영화 <반드시 잡는다>는 이러한 암묵지의 존재를 일깨우면서, 노인의 고유한 능력을 환기시킨다.



여기에 흔히 노인은 행동력이 없다고 여기지만(경찰서에서의 대화 “30년 전의 범인이 지금 몇 살일 것 같아요? 최소 환갑은 넘었을 텐데, 그런 노인이 무슨 힘이 있어서”), 충분히 살인이나 납치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그런 살인범을 잡으러 뛰어다닐 수도 있고, 나름 처절한 몸싸움도 할 수 있는 행동력을 지닌 존재라는 증명을 영화가 해 보인다. 즉 영화는 독거노인이 연쇄살인자의 연습용 희생자로 활용되었다는 설정을 통해, 노인이 신체적으로도 약자이고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회적 취약자라는 것을 고발함과 동시에 노인이 희생당하는 약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낸다.

또한 영화는 덕수가 언제나 집세 운운하는 인물이지만, (자신이 목숨을 걸고 살려낸 젊은 여성을 보고도 그 말을 할 정도로) 그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그리 보이는 것일 뿐, 실상은 지은이 말하듯 깊은 속정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준다. 젊은 세대와 단절된 노인계층을 꽤나 호감 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 시키는 것이다. 영화는 범인이 노인을 대상으로 일종의 혐오범죄를 저지르고, “어차피 죽을 것 조금 일찍 가는 것” 으로 말하는 것을 보여주며, 이와 상반되는 긍정적인 노인관을 피력한다. 노인은 그들만의 암묵지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치매 걸린 노인의 헛소리로 치부되는 말들도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 보호받을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

반면 영화에서 여성은 아무리 젊어도 일체의 자기보호 능력이 없으며,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그려진다. 지은은 습격을 받았을 때나 마지막 탈출에서 단 한순간도 자신을 보호하거나 반격하지 못한다. 완벽한 약자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더욱 불편한 것은 영화가 보호받아야 할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미묘하게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덕수와 평달이 지은의 집에서 발견한 것은 무려 시신이다. 하지만 덕수와 평달은 이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생존자를 살리기 위한 판단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평달의 정신상태를 확인한 이후에도 덕수는 그 결정적인 증거를 경찰에 말하지 않은 채, 장황한 사건 설명을 해댄다. 요컨대 지은 친구의 죽음이 너무도 사소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지은 친구의 시신은 내내 방치되다가 마지막까지 경찰에 의해 언급·발견·수습되거나 가족에게 인도되는 모습이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한 사람의 목숨 값으로 취급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은을 살리기 위한 고군분투를 담은 영화가 지은 친구의 죽음을 이토록 하찮게 다루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반드시 잡는다>에서 홀대받는 여성은 또 있다. 범인의 아내는 30년 전 지은 혹은 민사장과 마찬가지로 납치된 희생자이다. 그는 30년간 끔찍한 학대를 당하며 살아왔으며, 지금도 범인의 아내가 아니라 범인의 인질로 그곳에 존재한다. 이러한 진실이 막 밝혀진 순간, 그는 너무도 허무하게 범인의 손에 죽는다. 액션의 클라이맥스에서 몸싸움이 얽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의 죽음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즉 그 순간만 넘겼다면 마지막에 구출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수십년간 고통받아온 여성에게 단 한순간의 자유와 여생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지은과 지은의 친구와 범인의 아내에 대해 영화가 이토록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덕수와의 관계가 다르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액션의 주체인 남성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희생자에게 배분되는 운명이 달라진다. 덕수라는 남성주체와의 관계에 의해 반드시 구해야 될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이 나눠진다. 즉 덕수의 입장에서 지은은 반드시 살려야 되는 여성이고, 지은의 친구는 내가 잘 모르는 망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그만이고, 범인의 아내는 이미 범인에게 속한 여성이니 그의 손에 죽더라도 할 수 없다는 식의 가치 판단이 영화 안에 스며있다.



돌이켜보면 <반드시 잡는다>는 처음부터 덕수에 의해 존중받고 보호받을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나누고 있었다. 덕수는 방문봉사를 온 중년여성에게 막말을 하고, 할머니가 늘어놓은 고추의 한가운데를 오토바이로 가로지르며 달려 민사장의 토스트 가게로 향한다. 민사장 앞에서만은 예의바르게 행동하며, 그에게 과거를 환기시켜 상처가 덧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다 늙어도 내가 호감을 지닌 여성을 지켜줄 수 있는 남성과, 그들과의 거리에 의해 생사여부가 결정되는 여성들이 존재한다. 영화는 노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로 연결되듯이 노인과 여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약자임을 전제하면서도, 노인은 생각보다 강한 존재이고, 여성은 하염없이 약한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에필로그는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여성에게 ‘어르신’(노인)이 아닌 ‘덕수씨’(남자)로 불리고픈 남성의 자아를 보여준다. 예컨대 주인공이 할아버지일망정 <청년경찰>의 주인공이 품었던 비대한 남성자아의 무의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에필로그가 확인사살한다.



그런데 젊은 여성과 중년 여성이 그토록 무력하고, 할아버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존재일까. 낡은 공동주택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범죄를 평범한 사람들이 해결하는 비슷한 장르의 영화 <범죄의 여왕>에서 젊은 여성은 자기보호에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결정적인 한 방을 지닌 존재였으며, 중년여성은 용감하고 정의롭게 범죄를 해결하였다. <반드시 잡는다>가 품은 젠더적 구도에 의아함이 느껴진 사람이라면, <범죄의 여왕>을 보고 입가심을 하기를 권해드린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반드시 잡는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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