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일의 약속’, 남의 일이 아니라서 더 슬픈 이야기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도대체 뭐였지? 내가 왜?”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의문 부호를 찍는 일이 생기곤 한다. 어제 저녁만 해도 베란다로 나섰다가 왜 나왔는지 도통 모르겠어서 그냥 들어오고 말았으니까. 예전 같으면 한참을 서성대며 고민했겠지만 이젠 어차피 그래봤자 기억이 날 리 없다는 걸 아는지라 이내 포기하고 만다. 언젠가는 생각나겠지 하며. 이런 식의, 전화기를 냉장고에서 찾았다거나 휴대폰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거나, 자동차 문 밖에 신발을 벗어 둔 채 운전석에 올랐다거나 하는 건망증은 사실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다. 누군가가 모임에서 한번 경험담을 꺼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에피소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정도로 이어지니까. 이런 수다는 언제나 ‘이거 치매 초기 아니야? 노인에게만 오는 게 아니라는데? 어쩌지?’로 끝이 나기 마련인데, 그런데 이번 주 시작된 SBS 월화극 <천일의 약속>이 경도인지장애와 치매 사이에 놓인 주인공 이서연(수애)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한 것이다.

주전자를 홀랑 다 태워먹고 까맣게 그을린 부분을 수세미로 박박 닦으며 속상해하는 일이며, 놓쳐서는 절대 안 될 중요한 일정을 잊은 일, 그리고 어딘가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대중교통으로 집에 돌아온 일까지, 나 역시 서연의 증세와 유사한 경험이 있다. 다행히 그런 스케일의 사건들이야 몇 년 사이 드문드문 박혀 있다지만 앞서 말했듯이 베란다에 왜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거나, 휴대폰을 꺼냈는데 어디에 걸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들은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실정. 급기야 드라마 속에서 서연은 날로 심각해지는 자신의 건망증 증세에 결국 의사와 마주 않게 되는데, 그녀가 체감한 일련의 사건들이 나를 포함한 중년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음직한 일인지라 경험자 입장에서 이 드라마의 전개를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젊은 사람도 증세가 심해지면 저리 걷잡을 수 없거늘, 그럼 나는?’하게 되는 것.

치매를 유발하는 질환, 알츠하이머. 이 겁나는 질병이 더 이상 노인성 질환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간 몇몇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익히 알려진 바 있다. 손예진의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드류 베리모어의 <첫 키스만 50번>, 그리고 유오성의 <투명인간 최장수> 같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한 작품들인데, 물론 실제와는 다른 부분이 많겠지만 우리는 이런 작품들을 통해 생소했던 질병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저 작품 속 얘기려니 하고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던 알츠하이머가 <천일의 약속>에서는 왠지 내일처럼 바짝 곁으로 다가온다. 아마 지극히 정상적으로, 아니 오히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일상생활을 잘해오던 서연이라는 인물이 뇌기능 이상으로 인해 어떻게 망가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의사(장현성)는 언제부터 증세가 시작됐느냐, 어떤 일들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지금 몇 년도죠?”라는 질문까지 나오자 그 심각성을 눈치 챈 서연이 “저 치매인가요? 아니면 치매로 가는 중간, 경도인지장애 그건가요?”라고 물었다. 그 후 간단한 문항 체크부터 덧셈, 숫자 거꾸로 세기, 채소 이름 아는 대로 말하기, 나열해둔 물건을 기억했다가 말하기 등, 기억력 테스트가 이어졌는데 그 순간 마치 내가 환자라도 된 양 질문에 대한 답변이며 테스트를 하나하나 함께 따라가고 있었다. 서연이 ‘명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꾸물거리자 나도 모르게 “명함이잖아!”라고 입 밖으로 소리를 냈을 정도니 두 말하면 잔소리가 아니겠나. 의사는 “경도인지장애와 치매는 공통된 부분이 많아 신경심리검사만으로는 구분이 힘들다”라며 확답을 미뤘다. 그러나 이미 서연이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시청자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일 밖에.

김수현 작가의 KBS2 <엄마가 뿔났다>가 방송될 당시 세상은 온통 가정주부의 안식년 요구에 대한 얘기로 수선을 피웠다. 올해는 어째 내게도 부지불식간 닥쳐올지도 모를 알츠하이머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딜 가나 이야기판이 벌어질 것 같다. 내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그때가 올 수도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니까.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entermedia.co.kr
그림 정덕주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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