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글러스’ 비서들 역할론, 왜 점점 보기 불편해지는 걸까

[엔터미디어=정덕현] KBS 월화드라마 <저글러스>는 마치 저글링을 하듯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처리하는 비서들을 ‘저글러스’라 지칭했다. 그것은 아마도 비서들이 하는 일들이 그만큼 중요하고, 그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며, 따라서 그들이 남다른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걸 특별하게 담기 위함이었을 게다. 비서라는 지칭이 갖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을 이 드라마는 의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비서들의 면면은 어떨까. 그것이 과연 비서들의 업무가 맞는 것인가 싶은 일들이 넘쳐난다. 물론 인물이 처한 상황을 극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시퀀스들이겠지만, 상사의 성공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래서 상갓집에 마치 아내나 되는 것처럼 함께 가 눈물 흘리는 연기를 보인다. 스케줄 관리야 비서들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일 수 있지만 넥타이에서부터 옷차림에 상사의 애인에게 이별통보를 대신하는 일까지 챙기는 것이 과연 비서가 해야 하는 일인지는 의문이다.



그런 일들이야 어쩌면 실제 비서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백번을 양보한다 하더라도, 룸싸롱 접대 자리에 비서를 대동하고 술을 따르게 하는 건 지나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여성이기 때문에 더더욱 불편해지는 자리지만, 그건 사실 남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술자리 접대가 갖는 권력적인 관계의 불편함에 여성을 마치 술 따르고 자신들의 일을 보조해주는 존재 정도로 치부하는 그 비뚤어진 시각이 거기 더해져서다.

<저글러스>가 그리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그들이 하는 일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드라마 속의 남성들(주로 이사들이다)은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그것이 무슨 일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일을 하면서도 유유자적이다. 어찌 보면 일보다는 회사 내 정치 게임에 더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무도 있다. 대신 여성들(주로 비서들)은 그 우아한 백조들을 떠받치고 있는 물 밑의 발처럼 종종대며 별의 별 시시껄렁한 일들을 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물론 이건 갑질하는 보스와 당하는 을로서는 비서라는 관계를 극적으로 보이기 위한 설정들이다. 그래서 뒤에서는 투덜대기도 하고 욕을 해대기도 하지만 그들은 자발적으로 보스 모시기에 동참하는 시스템 속에 놓여져 있다. 사장 비서가 집합을 걸면 모든 회사 내 비서들이 모여 군대 훈련 받듯이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베스트 보스 어워드’에 참가해 자기 보스를 우승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즉 이 시스템은 교묘하게도 남성 상사들이 여성 비서들을 운용하는 방식으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 여성 비서들 사이의 위계를 통해 저 스스로 굴러가는 방식을 갖고 있다. 어째서 이 많은 비서들 중에 상사들의 부당한 지시나 쓸 데는 마치 아내처럼 부려먹고는 버릴 때는 휴지조각이나 되는 듯 버려지는 그 처우에 대한 항변을 하는 이가 한 명도 보이지 않을까.

물론 <저글러스>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다. 그래서 갑질하는 보스와 당하는 을로서의 비서들은 그 권력 관계를 통한 코미디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런 위계를 이용한 코미디는 실제 코미디에서도 종종 비판받는 요소들이 된 지 오래다. 게다가 이 드라마가 지향하고 있는 멜로 구조는 이러한 핍박 속에서도 기묘하게 보스와의 사랑을 판타지로 내세우는 퇴행적인 양상을 드러낸다.



로맨틱 코미디가 그저 웃음만을 주기 위한 설정들로 웃음을 주던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있다. 그것이 어떤 불편함을 담고 있는 상황에서는 제 아무리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상황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을 즐길 수가 없는 시대인 것. 비서라는 직업이 가진 진짜 중요성 같은 것들이 이 드라마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고, 또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차가 너무나 성차별적이다.

이것은 뒷부분에 가서 주인공의 각성과 반전을 위한 초반 설정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영화와 달라서 긴 흐름으로 이어가고 전편을 다 보는 이들도 있지만 간간히 드라마를 들여다보는 이들도 있다. 그런 시청자들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이런 비뚤어진 성의식과 직업의식에 반기를 드는 캐릭터 하나 정도는 늘 자리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치 모든 비서들은 다 저렇고(또 모든 직장상사들이 다 저러하며) 그런 일들은 온전히 여성들만의 몫이라고 당연시하는 드라마의 시각은 시청자들에 따라서는 로맨틱 코미디라지만 로맨틱하지도 또 웃을 수도 없게 만들지 않을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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