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호텔’ 아류일까, 형보다 나은 아우일까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아류일까, 형보다 나은 아우일까. 방영 전부터 <윤식당>과 <효리네 민박>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을 받았던 ‘유기농 숙박리얼리티’ 프로그램 <달팽이 호텔>이 드디어 ‘차별점’으로 내세웠던 첫 손님들의 이야기를 공개했다. 3회 만에 한 자리에 모여 앉은 이상은, 김재화, 송소희 등 나이도, 직업도 다른 세 여성은 처음 대화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금세 공감대를 찾으며 편안한 대화를 나눴다. 타인인 동시에 서로의 위안이 되는 이 색다른 조합의 매력은, 1,2회를 다소 미심쩍게 지켜봤던 [TV 삼분지계]의 시선도 다소 호의적으로 돌려놓았다.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이지만 적어도 앞으로 <달팽이 호텔>이 지향해야할 방향성은 찾은 듯하다.



◆ 이경규의 변화를 확인하는 흐뭇한 순간

“처음 봤을 때보다 내가 사람이 됐어요.” <달팽이 호텔> 지배인 이경규의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에 30년 전 신인시절 한동안 프로그램을 함께 해본 경험이 있다는 가수 이상은이 깊이 공감했다. 예의로나마 무슨 말씀이냐 할 법도 한데 차마 부정하기 어려울 만큼 당시엔 대단한 성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이경규가 국악소녀 송소희에게 닭다리를 뜯어주고, 배우 김재화에게 편히 입을 옷을 장터에서 사주는 장면을 보게 되다니.



얼마 전부터 예능 프로그램의 흐름이 바뀌었지 않나. 설정보다는 자연스러움이, 갈등보다는 위로를 담은 내용들이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출연자가 개인기나 재미난 얘기를 보여주고 들려주면 그걸 제작진이 받아 담는 방식이 아니라 제작진이 출연자의 내면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끌어내 그것으로 이야기를 꾸려가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JTBC <효리네 민박>을 필두로 KBS2 <용띠 클럽-절찬상영중>, XtvN <키워드#보아> 등 시청률이나 흥행성과는 무관하게, 소통과 교감, 위안이 중심을 이루는, 한 마디로 소장가치가 있는 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이와 같은 바람직한 변화 안에 이경규가 자리했다는 사실이 반갑다.

이윤석을 비롯한 수발(?) 들어줄 후배 하나 없이 등장한다는 점도 놀랍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 요즘 그가 출연 중인 프로그램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JTBC <한 끼 줍쇼>며 채널A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 MBC <발칙한 동거>까지, 모두 앉아서 지시하고 대접 받는 상황이 아니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그간 여성 출연자가 설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 진행자라는 지적을 받아온 그가 함께 하는 수준을 넘어 여성들과 둘러 앉아 수다를 떨게 됐다. 이경규, 참 영리한 방송인이다.

방송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 여행이 주는 본질적 위로

<달팽이 호텔>이 <윤식당>과 <효리네 민박>의 아류일 거란 생각은 편견이었다. 막상 뚜껑이 열리니 겹쳐 보이는 프로그램이 그보다 훨씬 많았다. 손님들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려는 이경규의 모습에선 SBS <힐링캠프> 진행자였던 시절이, 혼자 주방에서 쿡방을 찍는 성시경의 모습에선 OLIVE <오늘 뭐 먹지?>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여기에 가장 어린 여성 출연자를 조직 내 ‘홍일점’ 막내로 섭외하고 ‘공식 애기’라 부르며 미모와 애교를 강조하는, 수많은 리얼리티에서 반복돼온 구태까지, 신선함이라곤 없었다.



미심쩍던 시선이 바뀌게 된 건 3회 방송에 와서다. 색다른 조합의 게스트들이 마침내 한 자리에 모여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다. 송소희가 건반을 연주하는 로비의 다른 한 켠에선 이상은이 책을 읽고 있고, 이경규와 막 장보기를 마친 김재화가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나이도, 직업도 다르고, 직접적인 일면식도 없던 이들은 곧 ‘여행’이라는 공감대를 찾아 편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육아와 일에 대해 고민하던 김재화가 눈물을 흘리고, 이상은과 송소희는 위로하듯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이 장면이 결코 급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순간을 위해 <달팽이 호텔>이 각자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감정을 서서히 예열해왔기 때문이다.

가령 김재화가 아이들과 통화하며 핸드폰을 통해 ‘자기만의 방’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송소희가 혼자 아우라지를 방문해 정선아리랑 음원의 가사를 쓰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처럼 각자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게스트들의 이야기가 있기에 보는 이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모두 다른 곳에서 온 이 게스트들은 짧은 만남 뒤 다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갈 타인들이다. <달팽이 호텔>은 이들을 애써 친하게 만들려는 장치를 두기보다는 그저 각자의 여행의 일부로 그려낸다. 그 덤덤한 시선이 여행의 의미와 위로의 기능을 새삼 환기시킨다. 그 “낯선 곳, 낯선 이에게 위로받는” 경험이 <달팽이 호텔>에 있다.

칼럼니스트 김선영 herland@naver.com



◆ MC와 게스트의 경계가 흐릿한 느긋함 속으로

사실 <달팽이 호텔>은 빈말로라도 참신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힐링 예능과 관찰 예능의 열풍이 불면서 2000년대 일본 영화 속 아이템을 연상시키는 예능들이 등장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미니멀한 템포의 편집, 카메라 앞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웃음에 욕심을 내기보단 서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는 걸 선호하는 방향성 등은 벌써 <윤식당>이나 <효리네 민박>에서 몇 차례 본 기억이 있지 않은가.

<달팽이 호텔>은 이와 같은 맹점을 느린 예능을 못 견디는 이경규를 총지배인으로 앉히고 그를 둘러싼 투숙객의 성비를 압도적으로 여성 위주로 채우는 것으로 극복한다. 이미 눕방이나 JTBC <한끼줍쇼>, 채널A <도시어부> 등을 통해 오래 찍는 예능의 경험이 있는 이경규지만, 그럼에도 쉬기 위해 정선을 찾은 투숙객들과 어울리며 각자의 옛 이야기를 천천히 묻고 듣는 이경규는 또 다른 그림이다. 자기 입으로 “그 사이에 사람이 많이 됐다”고 말하는 자화자찬이 어색하지 않은 이경규와, 이상은·김재화·송소희가 서먹함을 천천히 극복하고 말문을 트는 과정을 함께 담아내며 <달팽이 호텔>은 나름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를 테면 이런 장면들. “나도 손님인데, 나는 지금 앉아 가지고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울음이 터진 김재화를 달래주다 말고 이상은이 중얼거렸다. 아마 OLIVE <달팽이 호텔>의 테마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장면이었으리라. 결국 제작진이 노렸던 것도 투숙객들이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속내를 터놓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었을 테니까. “난 괜히 앉아 있는 거 같아. 친한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는데.” 호스트로서의 롤을 게스트들이 다 알아서 수행하는 걸 보며 이경규는 어색한 듯 웃어 보였지만, 사실 지금이 딱 괜찮다. 호스트와 게스트의 사이가 모호해져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들어주는 지금의 분위기야말로, 굳이 이 느리고 느긋한 프로그램을 보기로 마음 먹은 이들이 원했던 것일 테니까.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올리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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