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형, 캐릭터 놀이의 진수를 선보이다

[서병기의 대중문화 트렌드] 한양대 음대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한 정재형은 대중 취향이지만 다소 고상한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다. 클래식 피아노를 기반으로 하는 그의 음악은 대중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또 그가 영화음악과 현대음악을 공부했던 곳은 프랑스 파리다. 그래서 그를 파리지앵으로 부른다.

하지만 그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친근하고 만만한 캐릭터로 대중에게 가까워졌다. 정재형은 리얼 버라이어티(무한도전)와 토크쇼(놀러와, 라디오스타)에 시트콤(하이킥3)과 음악프로그램까지 다양하게 넘나들며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

국내 대중음악계에서는 특별한 존재인 정재형이 대중에게 친숙하게 각인된 것은 그의 고상할 것만 같은 이미지가 끊임없이 희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형돈은 예능에서 정재형을 끊임없이 타박했다. 구멍 뚫린 흰색 티셔츠를 입고나온 정재형에게 “화요일날 개화동으로 와라. 그 날 헌 옷 버리는 날이다. 그런 티셔츠 400개 있다”고 그의 패션감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피아노를 치며 음악을 들려주면 “형, 노래가 이게 뭐야”하고 시비를 건다. 그런다고 정재형의 패션감각과 음악의 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일종의 캐릭터 놀이다.

정재형은 샹송이 흘러나오는 카페에 앉아있는 멋있는 파리지앵이 연상되지만 예능에서는 개그맨 이봉원이다. 실제로 정재형은 ‘무한도전’ 하나마나 콘서트에 이봉원 캐릭터로 나왔다. 이처럼 정재형의 캐릭터가 고급스러움이 ‘산티’로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이미지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예능에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정재형은 지난 2일 방송된 MBC 시트콤 ‘하이킥3,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빚쟁이에게 시달리며 일상에 지쳐가고 있는 윤유선의 마음을 흔들만한 매력적인 남자 작곡가로 홀연히 나타났다. 둘은 바게트빵으로 인연이 엮여졌다.

가을남자 정재형은 조기폐경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갱년기 주부 윤유선에게는 마치 사막에 떨어진 작의 별의 어린 왕자 같았다. 에디뜨 삐아프의 음악을 듣자는 정재형은 낭만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남편 안내상과 달리 낭만을 아는 예술가였다. 윤유선은 상상속에서 정재형과 격정적인 포옹도 나누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정재형은 윤유선 가족에게 떼인 돈을 받으려고 고용된 심부름센터 ‘재형 심부름’ 사장이었다. 제작진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안내상 가족의 허탈감을 보여주기 위해 정재형을 활용했다. 이런 반전이 가능한 것은 정재형의 캐릭터가 잡혀있기 때문이다. 정재형이 지닌 파리 감성은 고급스럽고 패셔너블한 것이지만 예능에서는 촌스러운 것으로 희화되고 있다. 양쪽 극단을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캐릭터가 됐다.
 
윤유선이 정재형에게 “파리에 사세요”라고 묻자 정재형은 “아뇨, 집은 노량진이고요~”라고 말한다. 정재형의 전매특기인 ‘오호홍홍’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것은 윤유선에게 파리지앵으로 볼 때는 정갈하고 섬세한 느낌으로 왔지만 떼인 빚을 찾아주는 심부름센터 업자로 바라보면 음흉하게 다가온다.

정재형은 요즘 유행하는 음악예능에서 이적, 유희열 등과 함께 최고의 게스트다. 모두 싱어송라이터고 아티스트지만 예능에서는 망가지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들끼리 사석에서 나눌만한 강도 센, 다소 수위가 있는 대화가 방송으로 나가도 시청자들이 상당 부분 용인해준다. 유희열이 가끔 성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불편하지 않은 것은 감성변태라는 캐릭터를 깔아놓았기 때문이듯, 고상한 체 하지 않는 정재형도 대중이 편하게 봐줄 수 있다.

정재형은 ‘무한도전’에서 정형돈과 ‘파리돼지앵’이라는 희화화된 팀명으로 ‘순정마초’를 불렀다. 남자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여성들에게 ‘로망’이지만 오히려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하지만 음원에서는 큰 반응을 낳으며 대중에게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예능에서 선보인 음악팀 ‘파리돼지앵’은 생방송 무대인 한국방송대상 시상식에서 오프닝에 서기도 했다. ‘파리돼지앵’은 이태원 프리덤을 부르는 UV와 함께 속악한 키치의 힘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사례다.


칼럼니스트 서병기 < 헤럴드경제 선임기자 > wp@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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