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기에 압도, 대사에 몰입, 연출에 매료되다

[서병기의 대중문화 트렌드] 한석규의 부드러우면서 완벽한 연기에 압도되고,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현대적 느낌이 나는 실력 대결 구도 대사에 빠져들고, 군더더기 없는 장태유 PD의 연출에 매료된다.

SBS 수목극 ‘뿌리 깊은 나무’는 대단한 사극이다. 집현전 연쇄 살인 사건에서 한글 반포까지의 과정을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는 이 드라마는 조선 초기를 다루는 역사극이지만 현대극보다 더 현대적인 느낌이 난다. 의상은 옛날 것을 입고 옛날 집이 등장하지만 캐릭터간의 부딪힘은 완전 최신식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캐릭터간의 대결을 통해 선과 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 대립구도가 단순하지 않다. 여러 갈래다. 세종은 부친인 태종, 똘복 강채윤, 정기준(가리온)과 대립하고, 밀본 세력은 조말생(이재용)과 대결 구도를 형성한다. 또 재상은 집현전과 대립되어 있다.

실체가 궁금했던 소이(신세경)는 12회(10일)가 되어서야 똘복이와의 관계가 완전히 드러나고 소이 아버지나 똘복 아버지나 아무 죄없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똘복은 세종의 장인인 심온 대감집 노비로 일하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태종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다. 똘복 강채윤(장혁)은 태종의 아들인 세종 이도(한석규)에게 검을 겨눈다.
 
이 여러 갈래의 인물과 조직은 각자의 목적과 논리에 따라 경쟁하고 대립한다. 가장 강력하게 대결하는 구도는 세종의 민본정치와 삼봉 정도전에서 시작된 밀본의 재상정치와의 대립이다. 이 대결은 누가 더 합리적인지, 또는 누가 더 모순적인지, 누가 더 사물과 인간의 이치를 깊게 탐구하고 있는지를 조금씩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래서 보다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 이치를 찾아나간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느낌이 난다.
 
세종의 한글창제에 담겨있는 합리성부터 보자. 단순히 한글의 과학적 제자원리(발음기관인 혀,목구멍,이의 모양을 따 글자를 성형)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만들었다는 교과서적 모습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한자는 수백만 명이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사용하면서 만들어진 글이다. 반면 한글은 우리 몇 명이 몇 일만에 만들어 절차상의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큰 보편성은 자연의 이치를 담으려 한다. 소리의 이치 원리가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글자들이 혀, 목구멍, 이를 닮아 백성들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뱃사람이 미신을 믿는 것은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을 만나기 때문이다. 나도 만났느니라. 백성, 거대한 백성. 내가 이렇게 만들면 백성들이 써줄 것이란 걸 믿고 싶었다.”
 
이도는 이런 원리를 실현시키기 위해 구체적 실현 대상으로 소이를 설정하고 있다. 자신 때문에 아비를 잃었고 말을 잃었던 소이에게 말을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한 작업, 이것이 민본이자, 합리성이요, 권력의 정당성이다. 요즘 권력의 리더십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세종에 대립하는 밀본의 논리도 만만치 않다. 밀본의 시작은 정도전이다. 조선의 뿌리는 재상이며 왕은 꽃이다. 뿌리가 썩으면 꽃은 필 수 없다.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니라 선비의 나라다. 그런데 집현전은 오로지 왕의 논리를 따르는 신관만을 배출하고 있다. 그러니 집현전 철폐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도전이 왕의 권한을 제한한 이유는 백성을 위해서다.

세종과 밀본의 논리는 대결을 통해 계속 발전해나갈 것이다. 논리에 대한 뚝심과 확신도 드러나겠지만 스스로 논리와 실력을 보강하고 자각하면서 변화해 성장해나가기도 한다. 가령, 기도, 식도, 입 등 소리가 나오는 통로를 정확하게 보기 위해 유학을 섬기는 세종이 시체 해부까지 한다. 이것을 편집증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또 세종은 자신 때문에 말을 잃은 소이에게 말을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대결구도 방식은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전작 ‘선덕여왕’에서도 드러난 적이 있다. 미실과 덕만간의 통치방식의 대립이었다. ‘공포와 배제’의 미실과 ‘설득과 포용’의 덕만, 백성에게 ‘환상’을 만들어내 통치할 수 있다고 한 미실과 백성에게 ‘희망’을 만들어내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한 덕만간의 ‘100분 토론’식의 대립을 통해 양자의 정치관과 조직관리관중 어느 것이 나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러니까 ‘뿌리 깊은 나무’는 여러 갈래의 인물과 조직간의 대결과 대립, 특히 세종과 밀본의 논리 대결을 통해 어떤 게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일지를 생각해보는 게 관전포인트다. ‘선덕여왕’이나 ‘뿌리 깊은 나무’는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어 뻔한 길을 가더라도 이런 논리와 실력 대결 과정을 지켜보는 게 흥미롭다.

한석규는 부드러움과 강함을 겸비한 연기로 시청자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 1995년 ‘호텔’ 이후 16년 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한 그는 이 작품 하나로 안방극장에서 향후 20년은 취업이 보장될 것 같다. 세종은 욕도 하고 소품도 집어던지는 등 감정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더 많은 보편성과 합리성과 정당성을 찾아가고 있다. 이런 세종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칼럼니스트 서병기 < 헤럴드경제 선임기자 > wp@heraldm.com 


[사진=S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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