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츠’, 원작에 대한 애도는 고스란히 시청자 몫으로 남았다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2018년도 KBS 최고의 기대작 <슈츠>가 드디어 모습을 공개했다. 장기집권 톱스타 장동건과 신흥 대세 박형식의 만남, 주류 흥행 코드인 브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운 스토리,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탄탄한 원작 등 화제 요소를 고루 갖춘 <슈츠>는 방영되자마자 동시간대 시청률 1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반응은 벌써부터 꽤 엇갈린다. 원작의 캐릭터와 맞춤슈트처럼 잘 어울리는 캐스팅에는 호평이 다수인 반면, 스토리와 연출은 전형적인 한국드라마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이 많다. 엇갈리는 반응과 달리, [TV삼분지계] 세 평론가의 시선만큼은 모두 일치했다.



◆ 구식 AI를 이용해 만든 드라마인 줄 알았다

알파고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인공지능이 드라마 작가를 대신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왔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대중이 좋아하는 캐릭터와 설정을 조합해 얼마든지 변화무쌍하게 이야기를 풀어 갈 수 있으리라는 것. 실제로도 이미 시도되고 있다는데 이번 주 방송을 시작한 KBS2 <슈츠>를 보고 있자니 바로 그런 방식으로 데이터를 짜 맞춰 만든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부하고 전형적인 인물들이며 전개가 예상되는 빤한 상황들. 로펌 대표 강하연(진희경)과 파트너 변호사 최강석(장동건)의 옥신각신이나 신입 고연우(박형식)와 법률보조 김지나(고성희)의 티격태격만 봐도 그렇고 연우 주변 인물들의 면면은 특히나 단순하기 짝이 없다. 연우가 내치지 못하는 애증의 관계 철순(이상이)은 물론이고 세희(이시원)와 할머니(예수정)도 언젠가 한번쯤은 연우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겠지.



과거라면 장동건을 비롯한 최고의 캐스팅에 힘입어 이 정도 구성에도 시청자는 열광해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 많은 드라마를 봐왔다. 주당 수십 편의 드라마가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 아닌가. 로펌이 배경이라는 점에서 법률드라마 tvN <굿와이프>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고 사건 해결이라는 점에서 tvN <비밀의 숲>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SBS <리턴>의 패륜아 김학범(봉태규)을 본 마당에 사고뭉치 재벌 2세 박준표(이이경)에 만족하겠는가. 하지만 아직은 첫 걸음, 배우들의 매력에 걸맞은 섬세하고 반전 있는 전개로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주길 바란다.

방송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 1990년대 트렌디물에 주인공들만 다 남자로 바뀌었네

모든 걸 다 갖춘 완벽하고 차가운 주인공과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순수하고 자존심 센 주인공의 운명적 만남, 이들의 성공기와 그를 가로막는 라이벌들과의 경쟁구도, 그리고 소비지향적 라이프스타일을 감각적으로 전시하는 연출까지, <슈트>의 핵심 요소들은 1990년대에 등장한 트렌디로맨스의 기본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세련된 정장을 빼입은 미모의 전문직 주인공들이 무언가를 성취하려 노력하지만 결국엔 병원이나 법정에서 서로 밀당하는 얘기 말이다. 주인공마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장동건이다. 유일하게 바뀐 점은 그의 상대역이 남자라는 것. 최강석(장동건)이 츤데레 흑기사 남주라면, 고연우(박형식)는 씩씩한 캔디 여주의 남성 버전이다. 이마저도 십년 전이라면 신선한 구도였겠지만 지금의 브로맨스는 이미 주류 흥행 코드로 자리잡았다.



진부한 이야기나 스타일보다 더 두드러지는 여성 캐릭터 활용의 문제점도 이 ‘남자들만의 이야기’라는 한계에서 나온다. 첫 주 만에 연우와의 이성애 삼각관계를 암시하는 지나(고성희)와 세희(이시원)의 캐릭터가 특히 그렇다. 첫 만남부터 연우 때문에 옷에 흙탕물이 튀기는 악연으로 시작해 계속해서 혼자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지나의 캐릭터에선 원작의 프로페셔널함을 찾아볼 수 없고, 누가 봐도 애인의 절친인 연우에게 마음이 가 있는 세희의 캐릭터는 남주인공의 성적 매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적 역할에 머문다. 2회 말미에 세희가 지나와 함께 있는 연우의 모습을 목격하는 전형적인 삼각 구도는 벌써부터 지루하다. 냉철한 여성보스 강하연(진희경)과 로펌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 홍다함(채정안)의 존재 정도만이 <슈츠>의 원작이 미드임을 알려주는 단서다.

칼럼니스트 김선영 herland@naver.com



◆ 원작의 매력이 사라진 자리를 호들갑으로 채우다

원작 <슈츠>(미국 USA 네트워크)의 두 주인공 하비 스펙터와 마이크 로스는 둘 다 만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전설적인 승률을 지닌 변호사 하비의 정제된 오만도 볼 만하지만, 영악하고 겁 없는 마이크도 걸물이다. 마이크는 빼어난 머리로 로스쿨 대리시험을 쳐주면서도 그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기꾼이고, 자신을 뽑는 걸 주저하는 하비에게 “이해할 수 있어요. 가끔은 멍청한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재미있죠.”라며 상대를 도발할 줄도 아는 인물이다. 이처럼 변호사 하비와 사기꾼 마이크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며 쿵짝을 맞추는 과정이, 결과적으로는 승소를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데 기여하는 역설을 보는 재미야말로 원작 <슈츠>의 매력의 원천이었다.



이와 같은 장점들은, 한국판에선 대부분 희석됐다. 고연우(박형식)는 비행을 싫어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보려는 청년으로 바뀌었고, 병든 할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그의 처지 또한 같은 상황을 담백하게 그려냈던 원작과 달리 한없이 축축하게 그려진다. 이처럼 착한데 불쌍한 인물로 둔갑해버렸으니, 최강석 변호사(장동건)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설득하는 장면 역시 한 차례 기회를 잃어봤던 사람의 간절함을 어필하는 장면으로 재해석됐다. 두 주인공만 바뀐 게 아니다. 원작의 패러리걸 레이첼이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도 마이크에게 자신의 프로페셔널함을 인지시키는 동안, 한국판의 김지나(고성희)는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이며 상대에게 자신을 프로로 인지해 줄 것을 초조하게 요구하는 캐릭터가 됐다.

캐릭터들의 매력이 반감되었는데, 원작의 근사한 스웨그는 유지해야겠으니, 드라마는 자꾸 호들갑을 떤다. 드라마는 첫 회 도입부부터 최강석이 카드 내기로 조커를 집어내어 스페이드 에이스를 집은 상대를 이기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혹시라도 시청자가 이게 얼마나 멋있는 장면인지 눈치 채지 못할까 친절하게 슬로우모션을 제공한다. 원작에선 대수롭지 않은 듯 슥 지나가던 마이크의 순간기억능력은 한국판에선 고연우의 머리 주변을 잔뜩 메운 자막 CG로 부산스레 강조된다. 어쩔 수 없다. 시작부터 수목드라마 시청률 1위를 찍은 터라 제작진은 만족할 테니, 원작에 대한 애도는 보는 이들이 할 밖에.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KBS]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