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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의 약속’ 아버지가 생각나서 울었다
기사입력 :[ 2011-11-16 15:10 ]


“아니 무슨 입 잘 못 놀리다가 목 잘린 귀신이 환생을 했나. 왜 말을 안 해, 말을. 소죽은 귀신하고 사는 것도 이젠 증말 신물이 난다. 혼자면 미련하면 됐지 왜 나까지 미련퉁이를 만드냐구. 속상해, 속상해. 이러다 병 키워가지고 과부 만들려고 그러는 거지. 어디가 문제가 있음 문제가 있다고 말을 해야지.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 40년을 살고도 속을 모르겠으니까 아주 내가 미쳐서 팔짝팔짝 뛰다 죽게 생겼다구. ”
김수현 드라마에도 이런 과묵한 캐릭터가 있다니..

- SBS <천일의 약속>에서 고모(오미연)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천일의 약속>을 보다가 펑펑 울었다. 서른한 살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라는 딱한 병에 걸린 서연(수애)이나 동생 문권(박유환)이 처지가 불쌍해서 운 게 아니라 서연이 고모 내외의 옥신각신을 보고 있자니 십여 년 전 타계하신 우리 아버지가 생각나 눈물이 절로 흘렀다. “이러다 병 키워가지고 과부 만들려고 그러는 거지.” 맘 약한 우리 친정 엄마는 서연이 고모처럼 대놓고 따따부따는 하지 못하고 만날 혼잣말로 구시렁거리기만 했다. ‘속상해, 속상해’, 그 소리도 내도록 엄마가 전화로 나에게 하고 또 하던 하소연이다.

서연이 고모부(유승봉)는 가족들에게 내색 않고 발바닥 티눈을 키웠다지만 우리 아버지는 홀로 병을 키우다 못해 결국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돌아가셨다. 체중이 하루가 다르게 주는 통에 종합검사를 받아보실 것을 권하고 또 권했으나 귀 닫고 고집을 부리시기를 어언 반년, 끝내 떠메듯이 밀려 입원하셨지만 검사 받다 말고 세상을 떠나셨다. 평소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죽기보다 꺼리셨던 당신 성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마지막이었지 싶다.

사실 서연이 고모부를 처음 보자마자 우리 아버지가 생각났었다. 마당에서 별 소란이 다 벌어져도 거들기는커녕 꿈쩍 않고 신문만 들여다보는 품새하며 밥상 앞에서도 쓰다 달다 말 한마디 없는 모습이 우리 아버지 그대로였으니까. 어려운 살림에 처조카를 둘씩이나 거두어 기르면서도 평생 생색 한번 내지 않으셨다는 거나, 고모가 서연이 남매 기죽을까봐 오히려 당신들 딸을 쥐어박곤 했어도 그거 전혀 노여워하지 않으셨다는 거나, 두루두루 우리 아버지와 많이 흡사하다. 김수현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죄다 달변이라고들 하나 천만에 말씀, 이처럼 군내가 날만큼 입 무거운 캐릭터도 있는 것을. 고모가 열 마디 쏟아냈더니 달랑 “허 참 별 일도 아닌 것 가지고 시끄럽게 구네.” 이 한 마디에 한숨 한번 보탰을 뿐이 아닌가.








서연이 고모부와 비슷한 인물은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도 있었다. 바로 정자(추상미) 아버지인데 저 싫다는 태수(이훈)를 죽자 따라 다니다 결국 애를 갖고도 환영 못 받는, 그러다 종내 다른 사내(이원종)와 바람이 나 아이들 다 놓고 집나간 딸년으로 인해 평생을 노심초사 맘 조리며 살아야했던 아버지였지만, 양반도 그런 양반이 없었다. 내 딸 책임지라며 깐깐한 태수 어머니(정애리)를 붙들고 한 바탕 할만도 한데 단 한 차례도 예의를 잃는 법이 없는 진중한 인품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저기 또 있네’ 했는데 정자 아버지를 연기했던 그 연기자가 지금 서연이 고모부를 맡은 유승봉 씨가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 마냥 점잖은 남편 때문에 속 터져하면서도 입을 봉한 채 살아야만 했던 정자 어머니 역의 연기자 조은덕 씨가 <천일의 약속>에서는 박지형(김래원)의 이모 역을 맡고 있다. 당시 맡았던 배역이 워낙 발만 동동거리며 영감 눈치, 사돈 눈치 봐야 하는 속 답답한 캐릭터였던지라 이번 역할의 자유로운 인물 설정에 보는 내가 다 반갑다.

어쨌거나 그처럼 말 없는 캐릭터지만 우리는 서연이 고모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성품인지 쯤은 다 안다. 심지어 뭔가 사건이 일어나면 어찌 반응할는지도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고모부뿐인가? 우리는 고모네 딸 명희(문정희)가 날이 차지면 다리에 쥐가 나는 버릇이 있는 것도, 하도 성질이 팔팔해 스트레스를 받으면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도, 무슨 사연으로 친정살이를 하게 되었는지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지 않는가.

그저 주인공의 병풍 신세에 그치는 여느 드라마들과는 달리 이렇게 김수현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아무리 소소한 배역이라 해도 각자의 생각과 삶이 있어서, 미래가 보여서 좋다. 자기 엄마와 말씨름 할 때면 더도 덜도 없이 딱 나 같은 고모 딸 명희도 나중에 TV를 보다가 손자에게 무릎베개 해주고 있는 노인을 보고는 나처럼 훌쩍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버지가 생각난다며.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entermedia.co.kr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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