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가 현실의 섬뜩함을 오롯이 보여주는 순간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시청자 중 두 명의 판사 박차오름(고아라)과 임바른(김명수)의 로맨스에 애틋함을 느끼는 시청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미스 함무라비>는 사적인 감정의 드라마가 아닌 공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다. 두 주인공의 로맨스는 그렇기에 이 교훈극의 재미를 위한 가벼운 향신료 정도다. 그 재미에 풋풋함을 느끼느냐, 닭살이 돋느냐는 시청자의 취향에 따라 갈릴 것이다.

취향을 타는 부분은 또 있는데 그것은 드라마의 감정과잉에 대한 부분이다. <미스 함무라비>는 가벼운 진행과 별개로 주 이야기가 시작되고 재판과정에 이르면 통곡 장면이 이어진다. 여주인공 박차오름부터 소송과 관련된 이들 모두 각 회차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계속해서 운다. 꼬인 플롯을 하나하나 해결하는 섬세함 대신 단조로운 플롯에 법정의 눈물 즙을 뿌리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통곡의 장면으로 클라이맥스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보는 이들이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는 있겠으나 세련된 작법은 아니다.



한편 여성들이 사회생활에서 겪는 문제를 주로 다루는 흔치않은 작품이지만 여주인공의 개연성을 입체적으로 잘 그려냈는지에 대해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지점도 있다. 여주인공 박차오름이 시원하고 멋진 여주인공이지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여럿이다. 무엇보다 법원 아닌 어떤 직장에서도 박차오름처럼 정의로움을 감정적으로 밀고나갈 수 있는 신입은 거의 없다.

또한 여주인공이 감정 조절을 못할 때 도와주는 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남자 임바른이다. <마녀의 법정>의 검사 마이듬(정려원)과 여진욱(윤현민)도 이와 비슷한 구도이긴 했다. 하지만 결국 마이듬이 주도적으로 사건을 요리하는 것과 달리 <미스 함무라비>에서 박차오름의 일은 어느새 임바른의 능력에 의해 해결점을 찾는 경우가 많다.

<미스 함무라비>는 소설에서 드라마로 변형되면서 좀 더 이성과 감정이 조화를 이룬 여주인공을 만들 수도 있었다. 혹은 감정적인 여성과 이성적인 남성 조언자라는 대립구도를 비틀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법복 입은 원더우먼을 법원에 출동시키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속 시원한 사이다를 마신 기분이 들다가도 이상하게 껄끄러운 트림이 나오는 건 그래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 함무라비>는 마냥 계몽적이고 평면적인 공익 드라마는 아니다. 오히려 <미스 함무라비>는 기존의 드라마가 드러내지 못한 현실의 섬뜩함을 오롯이 보여줄 때가 있다. 가벼운 웃음과 폭풍 눈물을 걷어내면 날카로운 칼날이 느껴지는 것이다.

<미스 함무라비> 3회의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의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대표적 순간이다. 박차오름과 임바른, 한세상(성동일) 판사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인 인턴 여사원의 억울함을 해결해준다. 특히 회사와 성희롱 가해자가 짜고 치는 고스톱 소송의 허점을 간파해낸 판사들의 해결책은 이 회차의 큰 재미였다. 재판 후 법원 경위이자 태권도 유단자 이단디(이예은)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흥미진진했던 재판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법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도 있다는 교훈적인 메시지가 화기애애하게 술자리에 맴돈다. 여기까지는 해피엔딩!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술자리가 끝난 후에 홀로 돌아가던 이단디는 어두운 골목에서 세 명의 불량배와 마주치고 협박당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이단디는 갑자기 골목 뒤쪽에서 나타난 술 취한 남성 야구팬들 쪽에 끼어들어 그 자리를 모면한다.

<미스 함무라비>의 이 짧은 장면은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아무리 강한 여성이라도 성범죄의 공포 앞에서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일상 앞에 언제나 공포의 순간이 닥칠 수가 있다는 것. 또한 어깨동무를 한 남성 야구팬들의 뒷모습에서 볼 수 있듯 아직까지 평범한 남성들은 그 공포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미스 함무라비>의 날카로운 현실감각은 여성 문제만이 아니라 법원의 인간군상을 묘사할 때도 종종 힘을 발휘한다. 4회 차에 등장하는 성공충(차순배)에 대한 묘사가 그러하다. 엘리트 코스를 밟지 못한 그는 법원에서 어떻게든 승진하려 성과에 매달린다. 대한민국 1%의 브레인이 모여 있는 법원에서조차 1%를 위해 버둥대는 성공충의 현실적인 모습은 텁텁한 씁쓸함을 남긴다. 더구나 성공충은 본인의 욕심이 여성판사의 유산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대한민국 최상위의 브레인, 그것도 사람의 죄를 판결하는 판사가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이처럼 <미스 함무라비>는 완성도와는 별개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시시한 감정놀음이나 어이없는 ‘병맛’으로 허무함만 남기는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나타난 뚜렷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당연히 썩 위대해 보이지 않는 유혹자가 등장하거나 영혼이 바뀐 남자가 두 명의 아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흐지부지해지는 이야기보다야 훨씬 매력적인 콘텐츠다. 물론 매 회 기나긴 눈물의 터널을 지나는 순간이 조금은 버겁더라도 말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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