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기의 트렌드] 요즘 여행책은 1만권 이상 팔리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여행책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라는 게 출판계의 이야기다. 아닌게 아니라 대형서점의 여행서적코너에 가보면 여행지를 알려주는 책들이 넘쳐난다. 대부분 어디 가면 경치가 좋고 뭘 먹으면 맛있고 숙박지는 어디가 좋고 하는 식의 여행 가이드 위주다.

2000년대초만 해도 1만권 이상 판매되는 여행책이 적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갑자기 여행 가이드책들이 쏟아져 나와 레드오션이 됐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여행지’ 시리즈와 같이 독한 책 제목이 나온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책 ‘여행의 기술’은 예외다. 2004년 번역본이 나왔는데 여전히 잘 팔린다. 여행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요즘 외국인이 쓴 여행책이 유독 잘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행의 기술’은 여행 안내서가 아니다. 보들레르, 플로베르, 워즈워스, 고흐 등 사상가나 예술가를 안내자로 삼아 여행을 떠나서 돌아오기까지의 단계별 여정,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가령, 보들레르를 대리체험자로 내세워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낙타 얼굴 표정에서 속물근성으로 가득한 자신의 고향 북프랑스의 부르조아와 정반대의 모습을 읽는다. 말하자면 여행을 빌미로 자신의 문화관, 인생관을 논하는 책이다.

TV 여행 프로그램도 여행책의 판매 양상과 비슷한 흐름을 겪고 있다. 여행지를 알려주는 안내 위주에서 여행자의 주관적 감성과 경험이 묻어나는 프로그램으로 진화되고 있다.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이하 ‘걸세’)’와 EBS ‘세계테마기행’은 그러한 여행 트렌드를 잘 반영해 대표적인 여행 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둘다 교양물로는 시청률도 꽤 높은 편이며 주말 재방송까지 해준다. ‘걸세’는 KBS 콘텐츠중 VOD로 많이 보는 몇안되는 프로그램이며 ‘세계테마기행’은 1주일치를 모아 주말에 재방송까지 해준다.
 
여행에 관한 웬만한 정보는 인터넷만 들어가면 넘쳐난다. 이런 내용을 모아 여행책을 꾸미는 건 효용가치가 떨어진다. 상세한 여행 정보를 깨알같이 담은 여행책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토니 휠러(Tony Wheeler)의 ‘론니 플래닛’(Lonely Planet)이 예전같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때문이다. 론니 플래닛은 미국 CIA에서 정보 자료로 참고한다는 책이다.

여행지를 영상으로 보여주며 소개하는 KBS ‘세상은 넓다’가 그럼에도 살아남은 것은 외국을 다녀온 시청자가 직접 찍은 영상을 소개하는 UCC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 ‘세상은 넓다’는 1995년 9월에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무엇 보고, 어느 음식점이 맛있고’ 하는 안내 중심이다. 이런 내용만으로는 인터넷에 수많은 개인들이 올려놓은 여행정보들을 당해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걸세’와 ‘세계테마기행’은 여행자 입장에서 가슴으로 느낀 주관적인 스토리텔링형 감상기로 어필하고 있다. 여행지를 둘러보는 여행이 아닌, 여행자의 내면을 쫓아가는 행로로서의 여행이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잡다한 여행정보에 초점을 맞추는 일반 여행 프로그램과 달리 여행을 하는 사람의 감성과 감정을 더 중시한다. 그래서 세계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문화와 삶의 모습을 담는다. 여행자는 KBS 교양PD들이 돌아가면서 맡게 되는데, PD들 사이에 매우 인기가 높다.
 
‘걸세’의 내레이션이 항상 ‘나는~’으로 시작하는 것도 PD라는 평범한 여행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시청자들에게 맛보게 하기 위해서다. 일반인들이 외국을 여행할 때는 유적지나 전통시장 등 볼거리 위주라면 ‘걸세’는 PD가 구석구석 발품을 팔아가며 체험으로 풍광을 담아주고 그 지역 보통 사람들을 만나 식사하고 가정도 방문, 생활을 담아내 구수한 사람 냄새가 나는 게 특징이다.

‘걸세’는 최근 가정의 달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시청자와 함께하는 걸어서 세계속으로’ 참여 신청을 지난 28일 마감한 결과 무려 총 1만 2천여 건의 신청이 들어왔다. ‘1박2일’ 못지 않게 시청자 참여도가 높다는 것은 시청자들이 ‘걸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말해준다.
 
‘세계테마기행’도 단순한 여행 정보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배낭여행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체험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패키지 여행 패턴인 단순 유람이나 관광을 너머 여행지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알려진 인사를 여행큐레이터로 활용한다. 이들은 여행 전문가 입장에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상태로 여행지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일반인의 모습으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소통하며 여행을 대리체험하게 한다.
 
자전거 여행가 이창수가 일본의 지방 현 곳곳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시골 집에 묵으면서 떡도 만들고 주인집 가족들과 대화하는 것을 보면 ‘아, 여행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라는 느낌을 받는다. 시골의 마츠리(축제)에도 직접 참가해보며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만들어준다. 이창수 씨가 베트남, 필리핀 섬 세 곳으로 떠나 그 곳 아이들과 노는 모습은 천진난만하기까지 했다. 여행이란 여유의 문화인데, 나는 언제 저런 자유와 여유를 누려볼까 하는 기분이었다.

여행생활자 유성용이 멀리 중남미에서 태평양 횡단열차를 타고 부족민을 만나러 가고, 멕시코에서 식당을 하는 젊은 일본인 부부를 만났던 장면은 평범한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감동을 이끌어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태국의 수상가옥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그들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세계테마기행’은 각국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습득하게 할 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자가 여행중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인간적인 유대와 소통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흐믓해진다.


칼럼니스트 서병기 < 헤럴드경제 대중문화전문기자 > wp@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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