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스탠바이, 웬디>는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지닌 21살 웬디가 혼자서 여행하는 과정을 담은 로드 무비이다. 영화를 연출한 벤 르윈 감독은 전신마비 장애인의 성치료를 다룬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2012)을 통해 장애인의 삶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여준 바 있다. 영화에는 반가운 얼굴이 나오는데, <아이 엠 샘>을 통해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아역배우가 된 다코타 패닝이 성인이 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 지역 재활 센터에 사는 웬디

영화 <스탠바이, 웬디>는 샌프란시스코 지역 재활 센터의 일상을 비추며 시작된다. 출근한 센터장은 웬디에게 3초 눈 맞춤, 표정 따라 하기 등을 시켜보고, 웬디의 하루 일과를 듣는다. 웬디는 시간에 따라 철저하게 반복되는 동선을 읊는다. 요일에 따라 입는 옷 색깔도 정해져 있다. 웬디는 비교적 경증의 발달장애인으로, 지역 재활 센터에 거주하며 빵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산다. 퇴근 후에는 매일 TV로 <스타트랙> 시리즈를 보는 ‘덕후(오타쿠)’이다. 웬디의 삶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규칙적이고 단조롭게 사는 것 뿐 이니까. 하지만 센터장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고, 갑자기 화를 내는 등 감정처리가 미숙함을 알 수 있다. 제목인 ‘스탠바이, 웬디’는 웬디가 분노조절을 못할 때 센터장이 심호흡을 시키면서 하는 말이다.

이곳에 오기 전, 웬디는 가족과 함께 살았다. 싱글 맘이었던 엄마는 웬디 자매를 키웠다. 언니 오드리는 어린 웬디를 잘 돌봐주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도 오드리는 웬디를 잘 돌보았지만, 오드리가 결혼을 하고 아기도 임신하게 되면서, 웬디는 지역 재활 센터에서 살게 되었다. 웬디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살고 싶지만, 오드리는 웬디와 함께 살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감정조절이 잘되지 않는 웬디가 아기에게 위험할 수 있는데다, 남편과의 단란한 삶을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스탠바이, 웬디>는 오드리가 웬디와 함께 살던 집을 아예 팔려고 내놓은 것을 보여준다. 남편의 새 직장 가까이 이사 가기 위해 짐 정리를 하던 오드리는 어린 시절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본다. 자매가 다정하게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이어지다가, 웬디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자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드리는 웬디와 함께 치던 피아노를 새 집에 가져갈 수 없다며 마당에 내놓았다. 덩그마니 마당에 놓인 피아노는 집밖으로 내쳐진 웬디의 신세를 은유한다.

웬디를 보러 센터를 방문한 오드리는 이사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한 채 조카 사진을 보여준다. 하지만 웬디는 자신이 왜 조카 얼굴을 사진으로만 봐야 하느냐며, 화를 낸다. 집에 가고 싶다고 분노 발작을 일으킨 웬디를 뒤로하고 나오는 오드리의 마음이 무겁다.



◆ 황량한 외계 행성을 걷는 듯한 발걸음

다음날 새벽 웬디는 홀로 길을 나선다. <스타트랙> 시나리오 공모전에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내기 위해서이다. 원래는 오드리와 함께 우체국에 갈 예정이었으나, 분노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시간을 놓쳤다. 마감일까지 시나리오를 도착시키기 위해서는 직접 LA에 있는 영화사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웬디는 홀로 길을 나선다. 하지만 웬디는 정해진 길로만 출퇴근을 반복할 뿐, 미지의 장소를 찾아간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심지어 시내버스와 고속버스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 웬디가 샌프란시스코에서 LA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2003년에 개봉한 옴니버스 인권영화 <여섯 개의 시선>에 속한 단편영화 <대륙횡단>에는 뇌병변 장애인이 등장한다. 영화는 장애인이 혼자서 집 밖을 나와 이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그의 동선을 따라가며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지하도를 건널 수 없는 주인공이 무단횡단 하다가 경찰에게 제지당하는 모습을 비추는데, 이는 장애인에게 도심의 도로를 건너는 일이 ‘대륙횡단’에 버금갈 정도로 힘들고 위험한 일임을 비유하는 것이다.



<스탠바이 웬디>는 그보다 스케일이 크다. 영화는 <스타트랙>의 장면들을 삽입하며, 웬디의 여행을 낯선 행성을 걷는 우주인의 행보에 비유한다. 웬디는 자꾸만 어려움에 봉착한다. 고속버스에서 중도하차를 당하고, 지갑을 도둑맞고,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심지어 원고의 일부를 잃어버린다. 보통사람이라도 여행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웬디는 마감시간 안에 시나리오를 제출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행보를 계속한다. 시나리오 공모전 이름도 ‘용감한 걸음’ 이다.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웬디의 머릿속에 <스타트랙>의 장면들이 펼쳐진다. 엔터프라이즈호가 황량한 행성에 불시착하고, 커크 함장과 스팍만 살아남았다. 스팍이 말한다. “논리적인 결론은 하나, 전진입니다”

웬디는 <스타트랙>의 캐릭터들 중 유독 스팍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스팍은 지구인과 외계인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으로, 지구인과의 소통에 서툴다.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지닌 웬디가 자신을 외계 혼혈인과 동일시하는 것은 흥미롭다. 웬디가 쓴 시나리오 안에서 감정처리에 미숙한 스팍은 유머를 과학적으로 복원하려 한다. 시나리오의 마지막은 스타트랙 시리즈에 등장하는 외계종족 언어인 ‘클링온 어’로 된 해설로 채워져 있다. 영화는 심지어 웬디가 ‘클링온 어’로 현실세계의 누군가와 소통하는 장면까지 보여준다. 실종신고를 받고 웬디를 쫓던 흑인경찰이 숨어 있는 웬디를 발견하고 ‘클링온 어’로 말을 걸어 밖으로 나오게 한다. 그도 역시 트래키(스타트랙 덕후)였기 때문이다.

웬디가 속한 세계는 <스타트랙> 시리즈를 전혀 모르는 사람(동료경찰, 오드리, 센터장 등)이 보았을 때는 외계행성에 가깝다. 그러나 <스타트랙>을 좀 아는 사람(아르바이트 동료, 센터장의 아들)이 보았을 때는 현실의 일부로 이해되는 흥미로운 세계이며, 덕후(흑인경찰)가 보았을 때는 동족을 만난 듯 반가운 세계다. 웬디가 쓴 시나리오의 제목은 <다수와 소수>이다. 이는 영화가 웬디의 소수자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오드리와 웬디,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

웬디의 시나리오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제출되었을까. 공모전에 당선되었을까. 대개의 로드무비가 그러하듯이, 애초의 목표는 맥거핀에 불과하다. 그보다 웬디가 여행의 과정을 통해 어떤 성장을 이루었는지가 중요하다. 여행이 끝났을 때, 웬디의 환상 속에서 커크 함장의 죽음이 그려진다. 커크 함장이 헬멧을 벗자 오드리의 얼굴이 나온다. 광활한 우주에서 함께 길을 걷다가 이제는 헤어져야 할 동료가 오드리였던 것이다.

여행 도중 만난 고마운 할머니는 멀리 사는 손주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왜 같이 살지 않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짐이 되기 싫으며, 각자 삶이 있어서 점점 끼어들 자리가 없어진다는 말을 들려준다. 이는 웬디가 처한 상황과 일치한다. 웬디는 엄마가 물려준 집에서 언니와 함께 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언니에게 새 가족이 생기고 점점 낄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살기 힘들다. 영화는 동생을 지역 재활 센터로 보낸 오드리를 ‘나쁜 언니’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할머니의 말을 통해 웬디에게 통찰이 생기기를 기대한다.



다만 오드리가 웬디에게 품고 있는 몰이해와 막연한 불안감은 해소시켜주고자 한다. 영화에서 센터장이 웬디와 안정된 교감을 이루는 것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센터장은 웬디와 일정한 높낮이의 소리로 교감하고, 살갗이 직접 닿는 것에 민감한 웬디와 팔을 둥그렇게 마주하는 자세로 소통한다. 이는 센터장이 웬디의 세계를 가능한 침해하지 않으며 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센터장은 웬디의 실종을 걱정하는 오드리에게 웬디가 무척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이는 센터장이 웬디의 장애가 아닌 능력에 주목했기에 가능한 말이다.

영화는 웬디를 무능한 장애인이 아니라, 남다른 개성과 재능을 지닌 존재로 이해하는 관점이 필요하며, 막연히 아기에게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도 편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화가 에필로그처럼 보여주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아직 이사를 가지 않은 집 마당에 웬디가 치던 피아노는 그대로 나와 있다. 이는 웬디가 가족 안으로 편입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러나 오드리가 웬디에게 아기를 안기고, 아기가 웬디의 품속에서 편안히 잠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오드리와 웬디와 아기의 평화로운 만남과 공존이 영화가 도달하고픈 목적지임을 뜻한다. 그리고 쿠키 영상의 강아지의 행동을 통해, 웬디가 독립된 주거지에서 살게 되었음을 짧게 암시한다.



◆ 장애인과 가족, 그리고 지역사회

혹자는 영화의 이러한 결말을 미온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웬디와 같은 발달장애인들이 반드시 가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옳지 못하다. <말아톤>은 발달장애인 아들과 엄마의 관계를 그린 영화이다. 엄마는 모든 에너지를 아들에게 쏟아 부으며, 아들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모성을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 품에서 자립하려는 아들과 성장과 엄마의 성찰을 담는다. 즉 2005년에 나온 영화<말아톤>조차도 발달장애인의 삶을 가족애로 해결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있다. 발달장애인의 삶이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여 사회적 지원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전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사회에서 그러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데 있다.

올해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의 개막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이 되면>은 13살에 시설에 맡겨졌던 발달장애인 동생을 성인이 된 언니가 20년 만에 집에 데려와 함께 사는 일상을 담는다. 시설에 맡겨졌던 동생을 집으로 데려온다는 설정에서 언뜻 <스탠바이, 웬디>와 반대 방향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스탠바이, 웬디>는 웬디의 삶이 가족 안으로 편입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센터장과 센터장 아들, 아르바이트 동료, 길에서 만난 할머니, 경찰 등 지역사회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웬디를 믿고 지지하고 소통하는 것을 웬디가 지역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해결의 실마리로 삼는다. 에필로그처럼 가족과는 한발 떨어진 채 만나고, 언젠가는 웬디가 독립해서 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어른이 되면> 역시 언니가 희생을 감수하며 장애인의 부양의무를 지겠다는 영화가 아니다. 언니는 발달장애인이 사회와 격리된 채 시설에 수용되어 사는 것이 옳지 못하며,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가족이 자기 삶을 버리고 온전히 장애인의 삶을 책임질 수는 없다. 충분한 사회적 지원 속에서 ‘탈시설’과 ‘자활’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장애인이 가족에게 짐이 되거나 시설에 격리되는 악마적인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가족과 느슨하게 공존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사회는 이를 위한 사회적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 영화는 자매가 지역사회에서 정착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그 실상을 폭로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탠바이, 웬디>에 등장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지역 재활 센터는 한국 사회가 참조할만한 모델을 제시한다. 웬디가 사는 곳은 시설이 아니다. 지역에 기반을 둔 주거시설이자 센터장이 출근하여 돌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웬디는 나름 독립적인 주거환경을 누리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선 받고, 심리 상담이나 가족 상담 등의 서비스를 받는다.



◆ 부록 – 미국의 경우

미국 발달장애인들의 탈시설의 역사는 40년이 넘는다. 1970년대 인권운동과 반전운동의 영향을 받은 장애인 탈시설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탈시설-지역사회 지원체계가 구축되었다. 당시 발달장애인 부모운동들이 주정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전개한 것이 주효하였다. 1977년 펜허스트 판결을 기점으로 시설해체와 탈 시설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발달장애인지원법(일명‘랜터만법’)이 제정되었다. 당사자 운동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정부책임을 인정받은 점은 한국에서 롤 모델로 삼을 만하다.

1990년에 제정된 미국장애인 법(ADA)과 1999년의 옴스태드 판결을 거치면서 장애인에 대한 부당한 시설수용이 장애인차별에 해당되며,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이를 시정할 책임을 진다는 점이 명시되었다. 그 결과 탈 시설을 원하는 모든 장애인에게 시설이 아닌 집이나 지역에 기반을 둔 주거시설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2000년에는 발달장애인지원및권리에관한법이 제정되어, 2017년 현재 미국의 50개주 중 13개주에서 완전히 시설이 없어졌고,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가 크게 증가했다. 1988년에는 관련기금의 대부분이 대형시설에서 사용되었으나, 2012년에는 약 83%가 지역사회에 배정되고 대형시설은 폐쇄되었다. 한국사회의 장애인 정책을 세우는데 있어서 참고할만한 지점들이다.

* 이 글은 5월26일 ‘영화공간 주안’에서 열린 <황진미의 시네마게이트>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스탠바이, 웬디>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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