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백' 의자왕, 찌질하게 그릴 수 밖에 없었을까
 
[서병기의 대중문화 트렌드] 만약 백제가 패망하지 않았다면 의자왕은 훨씬 더 나은 인물로 알려졌을 것이다. 지난 22일 36회를 마지막으로 종영한 MBC 드라마 ‘계백’도 의자왕을 별 볼일 없는 왕으로 그렸다. 타이틀롤인 계백을 멋있는 장수로 만들려고 하다보니 의자왕은 더욱 초라하고 찌질한 왕이 돼 버렸다. 이는 황산벌 전투 외에 별다른 전공을 올리지 못한 계백을 영웅으로 만들면서 백제와 의자왕에게 ‘물’을 먹였던 김부식의 역사해석과 닿아있는 것이다.

의자왕은 성인으로 바뀐 날부터 수난을 겪었다. 의자왕인 조재현이 아버지인 무왕 역의 최종환보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등 캐릭터와 배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의자왕은 수많은 신라성을 공격하는 전공을 세워 신라인들이 무서워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내세우기보다는 정신적으로 나약한 인물로, 사랑에 눈먼 왕이라는 성격이 강하게 부각됐다.
 
의자왕은 계백을 좋아하는 은고에 대한 연심때문에 야비한 방법으로 은고를 뺏어 후궁으로 앉히고, 계백을 장군 그 자체로 대하지 못하고 항상 의심하는 컴플렉스 덩어리였다. 신라의 김춘추(이동규)가 의자왕은 평생 계백에 대한 의심이라는 병을 떨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의자왕은 황명을 어긴 계백을 죽이려 했으며, 정사암회의를 폐지하려는 등 폭압정치로 국정을 농단했고, 의형제를 맺었던 성충(전노민)이 반발하자 오히려 그를 파직시켰다. 당나라 사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켰다. 뿐만 아니라 의자왕은 술김에 서라벌 정벌에 나섰다 뇌진탕에 걸려 한동안 의식을 잃은 상태로 누워있기도 했다. 독단과 자만이 극에 달했다.
 
의자왕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극을 끝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의자를 정상적인 인물로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다. 정신을 차려 국정을 다시 살폈지만 당 10만군과 신라 김유신 5만군의 규모에 대적하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식으로는 캐릭터의 연관고리, 즉 개연성을 살릴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은고(송지효) 캐릭터가 이해하기 힘들게 변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계백을 멋있는 장수로 그리기 위해서는 계백에게 고난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의자왕이 의로운 장수에게 수난과 핍박을 가하는 괴팍한 왕이 됐으며, 이 괴팍한 왕을 어느 정도 정상화시키는데 은고라는 캐릭터가 재물로 이용됐다.
 
부모가 권력에 의해 희생됐던 은고는 원래 지혜로운 캐릭터였다. 초반 현명한 판단으로 권력을 함부로 구사하는 사택비(오연수)를 내쫒아냈던 은고가 의자왕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시점부터 갑자기 의자를 부추겨 폭정에 가담하며 계백과도 대립했다. 정세에 깊숙히 간여했던 황후 연태연을 내쫓게 하고 자신이 황후에 올랐다.



은고는 백제 군사전략을 적진인 신라 김춘추에게 넘겨줘 도비천성의 8천 백제군을 죽게 했다. 그 반대급부로 은고는 신라로부터 당나라의 세자 책봉을 승인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 나라 황후가 적국의 세작이 된 것이다. 현명했던 은고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짓을 하며 캐릭터가 변질됐다.
 
은고가 왜 이렇게 됐는지는 마지막주에 와서야 대충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역죄인 은고의 처리문제는 의자왕이 정상으로 돌아왔는지,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중신들은 의자왕에게 황후를 즉참하지 않는다면 민심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며 즉참을 간한다. 계백과 흥수(김유석)는 신라와의 전쟁을 앞둔 시점에 황후를 처형하면 적의 사기만 올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은고의 처형을 미루자고 한다.
 
여기서 의자는 은고를 즉참하라고 해도 인간적이지 못하며, 처형하지 말라고 해도 이상한 왕이 되버린다. 의자는 은고를 애잔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은고야, 내가 너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할 것 같구나”라고 말한다. 이 한마디로 의자왕은 인간적인 왕이 되는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의자왕 캐릭터의 전개과정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의자왕을 초라하게 만들면서, 적은 병력으로 황산벌전투를 이끌다가 죽은 계백도 그리 멋있는 장수가 되지는 못한 것 같다. 이서진의 카리스마는 ‘이산’ ‘다모’ 등 이전 사극보다 훨씬 못하다.
 
의자왕은 사극에서 개연성있는 모습으로 재조명할만한 인물이다. 김부식의 승자 입장의 해석을 뛰어넘지 못한 상태에서 의자왕은 김유신과 김춘추가 쓴 미인계에 빠져 여자에 탐닉하다 국사를 망쳤다는 일부 기록까지 더해져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의자왕하면 삼천궁녀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예능에서 의자왕은 여성에게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남자를 지칭한다. 맞선 프로그램 SBS ‘짝’에서 8명의 여자중 4명이 물에 뛰어들며 다가오는데도 물속으로 미리 나와 손잡고 여자와 나오지 않고 계속 의자에 앉아있다 ‘의자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스펙 좋은 인기남이다. 그래서 사극속 의자왕이라도 조금 새롭게 조명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칼럼니스트 서병기 < 헤럴드경제 선임기자 > wp@heraldm.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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