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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변산’을 예순의 감독이 만든 것으로 보겠는가
기사입력 :[ 2018-07-13 11:18 ]


‘변산’ 통해 드러난 이준익 감독 여성관의 변화와 한계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당연히 젊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인줄 알았다. 독립영화가 품음직한 청춘영화의 감수성에 저예산의 스타일, 그리고 가장 젊은 음악인 랩이 어우러진 영화라니, 누가 이 영화를 예순의 감독이 만든 것으로 보겠는가. 하지만 <변산>이 이준익 감독의 신작임을 알고 나면, 절로 미소가 번진다. <라디오스타>의 변두리 성, <동주>의 시에 대한 사랑, <박열>의 서로 영감과 영향을 주고받는 이성애관계 등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영화 <변산>을 지탱하는 키워드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지방소도시의 정서이고, 둘째는 랩이라는 음악, 셋째는 부모와의 갈등이나 첫사랑 등으로 표출되는 청춘의 성장이다. 영화는 헐렁하고 유쾌하다. 하지만 박정민이 직접 쓴 랩 가사는 의표를 찌르는 무언가가 있다. 느리지만 의뭉스러운 유머 속에 얄팍하지 않은 청춘의 각성이 있다. 또한 <님은 먼곳에><즐거운 인생><박열>을 거쳐 <변산>에 이르는 궤적을 통해, 이준익 감독의 여성관의 변화와 한계를 짚어볼 수 있다.



◆ 쇠락해가는 지방 소도시

학수(박정민)은 군대 제대 후 고향을 찾지 않았다. 서울의 홍대 근처에 자리를 잡은 그는 ‘서울 출신의 고아’라고 말하고 다닌다. 고향도 부모도 등진 ‘후레자식’을 자임하는 것이다. 그는 <쇼미더머니>에 ‘심뻑’이란 이름으로 6년째 출전하여 나름 실력도 인정받았지만 늘 안타깝게 탈락하는 신세이다. 심사위원은 랩 속에 약간 사투리가 섞여 있다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어머니’ 같은 주제어에서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덜컹거려 랩의 리듬을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고향과 부모가 그의 무의식에서 자꾸만 딴죽을 건다.

물론 그의 랩은 훌륭하다. 그것은 ‘경험의 차이’기도 하고 ‘감수성의 차이’이기도 하다. 남들이 ‘언제나 나를 사랑해주던 따뜻한 어머니’ 같은 상투적이고 피상적인 이야기밖에 하지 못할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모자의 피폐한 정서와 엄마에 대한 서걱거리는 연민을 발화할 수 있다. 모든 창작자들이 그러하듯이, 그의 개인사적 아픔은 창작의 자양이 된다. 단 그것을 대면하고 객관화할 수 있을 때 말이다.



예선 탈락의 고비에서 운명처럼 고향 친구들과 마주친다. 그리고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는 것이다. 건달로 떠돌며 가정도 버린 아버지, 엄마를 홀로 죽게 하고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은 아버지. 그가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화가 난다. 친구들이 “그러면 니 아버지랑 똑같은 사람이 된다”니, 참을 수가 없다. 학수는 어느새 고향에 와 있다. 십년 만이다.

전북 부안.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것은 노을 밖에 없네.” 라는 학수의 시처럼, 노을이 끝내주게 아름답지만 쇠락한 곳이다. <무진기행>에서 안개가 유일한 특산물이라는 구절의 오마주인 듯한 저 말은 ‘폐항’이란 단어와 만나 구체화된다. 실제로 줄포항은 20세기 초까지 서해안 3대 포구 중 하나로 꼽혔지만, 1930년대 토사가 쌓여 폐항 되었다. 지는 해, 쇠락한 고향, 죽어가는 아버지는 이미지 적으로 완벽한 결합이다



◆ 나쁜 아버지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잠깐 원수 같은 아버지를 보러간 학수는 뜻하지 않게 발이 묶인다. 그곳에서 학수는 동창들을 만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과거와 대면한다. 학수가 좋아했던 소녀, 학수가 괴롭혔던 아이, 학수를 짝사랑하던 소녀, 학수의 시를 훔친 선배 등등. 부안의 인구는 감소 중이며, 특히 젊은 층의 인구는 급격히 유출 중이다. 그러니 몇 명의 동창들이 만나면 서로 모를 수가 없다. “부안이 좁잖여~”란 말은 진실이다.

꼴 같지 않은 아버지. 지방 건달로 껄떡대다 딴 살림을 차리고, 노름까지 손을 댄 인간. 감방에 가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을 정도로 가족을 괴롭힌 나쁜 아버지. 어머니의 유언은 “아버지를 미워하지 마라”였지만, 그건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학수에 대한 애정으로 남긴 말이었을 게다. 즉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 학수 인생의 낭비라는 깊은 뜻이 담긴 유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수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끊지 못해, 그에게서 완전히 놓여나지도 못한다. 그러니 ‘아버지랑 같은 인간’이라는 말 한마디에 한걸음에 고향으로 달려온 것 아닌가.



그런데 아버지는 죽어가면서도 ‘가오’를 잡는다. 자기 죽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큰 소리를 친다. 주제에 학수더러 양아치처럼 살지 말라고 훈계질이다. 아버지의 비공식적인 유언은 “잘사는 것이 복수”란다. ‘네가 나를 미워하는 만큼 잘 살아서 나한테 복수하라’는 뜻이다. 화해를 구걸하거나 용서를 빌지도 않고 끝까지 잘난 척이다. 화가 난 학수는 결국 아버지를 한 대 친다. 아버지의 공식 유언은 “탄고기 먹지 말고....” 라는 대장암 예방 상식이다. 실소가 나온다. 이 유언의 순간, 아버지는 ‘가오’를 내려놓은 것이다.

그동안 아버지를 용서하지도 잊지도 못하고 있던 학수는 차라리 아버지를 한 대 침으로써 희한한 방식의 화해에 도달한다. 아버지와의 대면을 회피하고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강하게 부딪힘으로써 억압된 감정이 해소된다. 청춘영화이자 음악영화이면서도 징글징글한 부모와의 관계를 세밀하게 보여주었던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과 비견될만한 장면들이다.



◆ 선미라는 복병

학수가 고향에 와서 재회한 인물들은 대체로 의미가 없다. 처절한 갯벌 싸움까지 벌이지만, 별 의미 없는 짓거리다. 가장 의미 있는 인물은 선미(김고은)이다. 선미에게 학수는 첫사랑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학수는 미경(신현빈)에게 관심이 있다.

영화는 한동안 미경을 둘러싼 남자들의 경쟁 구도를 보여준다. 흔한 남성 중심적 서사에서 여주인공은 가장 아름답고 종잡을 수 없이 유혹적이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또라이적인 기질이 있어서 여러 남자와 쉽게 사귀고, 가끔은 양다리도 걸쳐서 남자들 사이에 분란을 조장하지만, 그녀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소유하기는 어려운 존재, 이것이 남성들이 욕망하는 미녀의 전형이다. 영화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서사를 따랐다면, 미경을 둘러싼 로맨스 소동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미경에서 선미로 중심축을 옮겨온다. 이것이 그나마 이준익 감독이 취하는 대안적인 모습이다.



선미는 학수의 시에 매료되었고, 그에게 받은 영감을 통해 자가 발전한 인물이다. 학수에게 노을은 가난한 고향의 처연한 아름다움이었지만, 선미에게 노을은 하늘을 꽉 채우는 충만한 느낌이다. 학수는 노을이 멋지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마니아로 즐길 줄은 몰랐다. 그래서 고향을 떠났고, 고향과 아버지를 부인하며 뿌리 뽑힌 채 살았다. 하지만 선미는 저물어가는 해가 하늘을 가득 채우는 노을에 빠져들었고, 그래서 출세를 바라지 않은 채 자기 충족적으로 살아간다. 쇠락한 고향에서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안정된 밥벌이를 하고, 좋아하는 문학을 계속 발전시켜 소설가가 되고, 아버지를 간병하며 살아간다.

물론 이것이 ‘허기에 시달리며 바깥을 방황하는 남자’와 ‘자기 충족적으로 집 혹은 고향을 지키는 여자’라는 고전적 구도의 반복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여성이 내면을 지닌 존재이고, 누구보다 자신의 성숙을 꾀하는 인물이고, 가장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가며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인물이라는 점은 이준익 감독의 여성관이 여느 남성감독의 여성관 보다 낫다는 점을 말해준다.



◆ 왜 선미가 굳이 학수를 깨우쳐야 할까

요컨대 대게의 남성작가의 서사에서 여성 캐릭터는 매력적인 존재로 탐닉되지만 내적인 일관성을 지니지 않은 파편화된 존재로 그려진다. <변산>의 미경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선미는 다르다. 그는 학수와 미경과 선배를 앉혀놓고 “하나는 도둑놈, 하나는 양다리, 하나는 후레자식”이라 일갈한다. 이는 선미가 이들보다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으며, 감독이 이를 승인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선미와 학수의 사랑은 남성이 욕망하는 여성을 남성들 간의 경쟁을 통해 차지하는 이성애로맨스의 공식을 벗어난다. 두 사람이 가장 깊숙한 내면을 알아보고 교감하는 예술적 동지로 맺어지는 것이다. 마치 <박열>의 후미코가 박열의 시에 매료된 후, 그를 찾아와 동거하며 동지가 되었듯이.

하지만 다시 만난 학수가 자아를 잃어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님은 먼곳에>의 패착이 연상된다. <님은 먼곳에>에서 순이가 ‘남편 찾기’라는 헛된 준거점을 초월하지 못하고 굳이 남편을 찾아 뺨을 때렸던 것처럼, 선미는 예전의 총기를 잃은 듯한 학수에게 굳이 깨우침을 주어가며 로맨스를 갈구한다. 왜 그래야만 할까. 순이는 남편을 찾아 길을 나섰지만, 그 사이에 많은 성장과 변화를 거치면서 이제 남편 따위는 안중에 없어도 그만이어야 하지 않을까. 선미 역시 자신에게 각성의 계기를 주었던 학수가 궁금했지만, 이제는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만 애정을 거두는 것이 맞지 않을까.



<님은 먼곳에>와 <변산>은 여성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여성을 남성보다 윤리적으로 나은 존재로 그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성을 궁극적으로 남성에게 잊었던 자아를 각성시키거나 끝까지 찾아가 계도하는 존재로 사유하는 한계를 지닌다. 선미가 학수의 공연에 찾아가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마지막 장면은 <즐거운 인생>에서 아내와 딸이 아버지의 공연에 와서 응원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왜 꼭 이런 장면이 있어야 할까. 일찍이 나의 가치를 알아봐주고, 세월이 지난 후에도 나를 여전히 기억해주고, 지질해져버린 나일지라도 계속해서 사랑해주는 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속보이는 남성 판타지의 발현이 아닌가.

촛불혁명 당시 16년 만에 리바이벌된 ‘선영아 사랑해’ 광고 카피에 대해 한 트위터리안이 쓴 문구가 떠오른다. “선영이는 사랑에 X도 관심이 없어요. 이제 선영이는 혁명에 관심이 있단다.” 이준익 감독은 여자들의 삶에 남자가 그다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나보다. 그걸 아는 순간, 이처럼 노골적으로 남성 판타지를 전시한 것에 민망함이 몰려올 것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변산>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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