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피해 막기 위해... ‘PD수첩’에 나선 피해자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또 다른 분들의 피해가 생기지 않기 위해...” MBC ‘PD수첩 - 거장의 민낯, 그 후’에 용기를 내고 나선 피해자들은 하나 같이 그렇게 말했다. 단지 자신들만의 고통과 아픔을 토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만만찮은 일을 겪고 그 후유증으로 심지어 삶 전체가 뿌리째 흔들려버린 피해자들. 그들이 이 어려운 폭로에 용기를 낸 건 자신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피해자는 심지어 ‘죄책감’까지 느낀다고 했다. “그 때 그 일을 당했을 때 더 용기를 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다. 당시 방송국 화장실에서 조재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자는 그 때 폭로했다면 그 사건이 공론화되어 그 후의 많은 유사 피해들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 후회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 때문에 그 후의 피해자들이 고통을 겪게 되었다 죄책감까지 느끼며.



지난 3월 방영됐던 ‘PD수첩 - 거장의 민낯’ 편은 김기덕 감독과 배우 조재현을 둘러싼 일상화된 성폭력을 여러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폭로한 바 있다. 방송이 나가고 나서 파장은 컸다. 그 방송 내용을 통해 보면 그건 영화 촬영 현장이 아니라 한 배우가 말한 대로 ‘동물의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시로 “같이 자자”고 말하는 감독과 그런 분위기가 일종의 ‘관행’처럼 되어버려 그걸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는 촬영현장의 스텝들. 그러니 그 속에 ‘포획된’ 배우들이나 여성 스텝들은 그 암묵적인 권력 앞에서 무력하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미투 운동이 불꽃처럼 피어나던 그 때의 상황에서 여러 커다란 이슈들이 이어지며 상대적으로 그 불꽃이 희미해져가자,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피해자들에게 고소라는 이름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과’를 했던 조재현도 일체의 ‘성폭력’은 없었다고 사안을 부인했고, 김기덕 감독은 “은혜를 이렇게 갚은 것”에 대해 화가 난다며, 자신의 명예훼손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들은 ‘PD수첩’이 방영되고 나서 잠깐 자신들이 치유된 것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고소장이 다시 날아오자 더 커다란 심리적 고통을 겪게 됐다고 했다.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 억울함이 겹쳐지면서 약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법도 이 사안을 해결해줄 수는 없었다. 경찰은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이 없어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법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다. 증거 불충분에 의한 ‘무혐의’는 가해자들에게 마치 자신들은 무고를 당했다는 식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러니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고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차 피해의 고통은 더 컸다.

후속보도인 ‘거장의 민낯, 그 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가 폭로를 하는 피해자들이 용기를 냈다. 만난 지 30분 만에 조재현에게 화장실에서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는 일반인 여성 피해자는 그 후로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방광염을 달고 살았다고 했다. 일반인 여성이라면 생면부지의 인물인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우리가 신문지상에서 그토록 봐왔던 성폭행 범죄와 하나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가 ‘묻지마 범죄’를 당한 것 같았다고 말한 이유였다.



‘PD수첩’의 내용들은 실로 전편에 이은 충격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보다 더 가슴 아프고 뭉클하게 만든 건 피해자들이 그 힘겨운 용기를 낸 이유였다. 피해자이기 때문에 다른 피해자의 상처를 너무나 잘 아는 이 분들은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 나섰다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묻힌다면 또 다른 피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 만일 우리사회가 정상적이라면 이런 고통을 호소하고 스스로 피해를 막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서는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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