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조차 글로 보는 이상한 세상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한 기업만 망가진 것이 아니라 거기에 몸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권력, 사회, 언론이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 삼박자에 전 국민이 속았던 겁니다." MBC LIFE <히스토리 후> ‘8년 만에 벗겨진 누명! 삼양라면 우지 파동의 진실은?’에서 1989년 사건 당시 직장을 잃었던 한 중년 남성이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일명 ‘공업용 우지파동 사건’, 비누 등의 원료로 쓰이는 저급한 우지를 수입해서 썼으며 인체에 해로운 산화방지제를 첨가하기까지 했다는 언론의 보도는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서민들의 고마운 음식으로 자리 잡은 라면이 실은 쓰레기와 다름없는 재료로 만들어졌다니! 특히나 라면 사업의 선두 주자였던 ‘삼양라면’이 사람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가지고 장난질을 쳤다는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다 사실이 아닌 왜곡 보도였다는 얘기다.

도마에 오른 업체들이 내놓은 해명자료에도 문제가 될 사안이 발견되지 않았음은 물론 보건사회부 역시 부적합한 구비요건을 찾아낼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검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지루한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사건 발생 8년 만에 겨우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미 천여 명이 직장을 잃었고 손실액만 해도 무려 천억 원을 넘었었다 하니 이 무슨 황망한 경우인가 말이다. 더욱이 이미 땅에 떨어진 회사의 명예와 신뢰는 회복할 길이 없었다. 이 모든 게 ‘공업용’이라는 느닷없이 등장한 단어 하나에서 파생된 일이다.

‘사골을 먹을 줄 모르는 미국인에게 사골은 공업용일 수밖에 없다. 쇠기름도 마찬가지였다’는 당시 사건 취재를 맡았던 한 기자의 말이 정답이지 싶다. 전문지식 없이 ‘공업용’이라는 단어 하나로 서민들의 ‘제 2의 주식’을 인체에 엄청나게 해로운 음식으로 둔갑시켜 버렸던 게 아닌가. 비식용용이기에 인체에 해로울 것이라는 단순한 추론에서 야기된 일인지, 아니면 소문대로 유일하게 팜유를 사용하던 경쟁 회사의 음해였던 것인지, 무성한 의혹만 남긴 채 사건은 일단락되고 말았다.

수많은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했고 라면 업계의 판도 변화를 초래한 가슴 아픈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돌팔매질을 한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일 밖에. 무엇보다 무서운 일은 아직도 ‘삼양라면’을 비롯한 몇몇 업체들이 실제로 인체에 유해한 라면을 제조했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아니겠나. 아마도 우르르 돌팔매질에 나섰던 이들이 책임감 있는 정정보도는커녕 나 몰라라 외면했기 때문이지 싶다.






이처럼 단어 하나가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파장과 결과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우리는 수시로 너무나 쉽게, 너나할 것 없이 말과 글로 어느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지 않은가. 사랑을 글로 배웠다느니 요리를 글로 배웠다느니 하는 요즘 농담도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TV조차 글로 보는 세상이다.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요약된 기사들이 수두룩하니 올라오곤 하는데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 중 앞뒤 다 잘라내고 발언 한 마디만 글로 내보내는 바람에 엉뚱한 오해를 받는 이가 생기기도 하고, 내용과 맞지 않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인해 사실이 왜곡되기도 한다.

이미 아시는 분들이야 다 아실 일이지만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기사에 제목을 붙이는 이들은 매체마다 따로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때론 포털 측에서 아예 구미에 맞게 제목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방송은 시청률이 관건이고 인터넷 기사야 클릭이 관건이니 어쩔 수 없다손 쳐도, 그렇다보니 글을 쓴 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글이 읽힐 때가 허다하다는 사실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내가 체험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최현정, 갑자기 뉴스에서 잘렸다’라는 제목에 무슨 언론 탄압이라도 벌어졌는가 싶어 서둘러 기사를 열어보니 어이없게도 최현정 아나운서가 MBC <주병진 토크 콘서트>에 합류하게 되면서 진행해오던 <6시 뉴스 매거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본 사람들이야 일명 낚시질을 당했다는 걸 깨달았겠지만 제목만 무심히 훑고 지나간 이들은 최현정 아나운서가 억울한 일이라도 당했다고 여길 참이 아닌가. 부디 우리 모두가 ‘공업용’이라는 단어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엄청난 피해를 교훈삼아 각자 주의를 기울였으면 한다. 내 말과 글로 인해 누군가가 손톱 끝만큼이라도 아픔을 겪지 않도록 말이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entermedia.co.kr
그림 정덕주


[사진=MBC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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