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스티브 잡스가 책 표지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감정의 더깨를 다 씻어낸 얼굴이다. ‘나는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메시지를 발산하는 시선이다.

이 시선은 완벽에 미친 잡스가 연출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응시(凝視)에서까지 완벽을 추구했다. 그는 자신의 시선이 최면을 거는 힘을 갖기를 원했다. 상대방의 뜻을 자신의 의지 쪽으로 굽게 하고 상대방의 존재를 자신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시선을 원했다.

잡스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면 상대방이 먼저 눈을 깜박이기를 기다렸다. 잡스는 적어도 책에서는 이 점에서 완벽에 이르렀다. 우리 모두는 늘 잡스보다 먼저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다.

달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누가 물었다. 오늘 들려드릴 잡스와 눈싸움과 권투와 바세린으로 꼬리를 무는 잡념이 그 중 하나다.

권투에서는 실제로 눈 깜박임이 승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땀이 눈에 흘러들어가면, ‘눈 깜작할 새’가 평소보다 길어지면서 상대방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눈에 들어간 땀을 글러브로 훔치는 순간 공격받기 쉽지 않을까?

권투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다. 하지만 상상이 이어진다. 권투 경기를 보면 3분 뛴 다음 코너로 온 선수 이마에 바세린을 발라주던데. 눈썹 위 이마에 바세린을 가로로 발라주면 땀이 그 선을 타고 옆으로 흘러가겠네? 땀이 흘러내려 눈으로 들어가는 걸 막아주겠군. 그렇다면 바세린 도포(塗布)는 상대방의 주먹에 노출될 위험을 줄이기 위한 것일까?

그전까지 내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이마에 바세린을 바르는 건 주먹이 미끄러지도록 해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다.’ 주위 사람들 생각도 비슷했다.

땀과 연관을 지으면서 기존 생각에 의문을 품게 됐다. 나는 사람들에게 반문했다. 권투에서 노리는 곳은 이마가 아니라 턱이나 관자놀이 아닌가? 빗나가서 이마를 때리는 주먹이 있더라도 맞는 선수가 받는 충격은 크지 않을 텐데, 왜 바세린을 바르지? 이렇게 묻고 ‘바세린은 분명 땀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며 앞의 새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몇 차례 술자리에서 논쟁을 벌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권투 도장 두 곳에 전화를 걸었다. 젊은 트레이너는 “눈썹 위 피부가 약해서”라고 대답했다. 다른 곳의, 연륜이 느껴지는 거친 목소리의 (아마) 관장님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눈 두덩이 뼈가 있잖아요. 모서리처럼. 그쪽을 맞으면 피부가 쉽게 찢어져요. 그래서 바세린을 바르는 겁니다. 얼굴 다른 부위요? 다른 곳에도 바르죠. 펀치가 미끄러지도록 하니까요. 규정은 없지만 너무 많이 바르면 심판이 닦고 나오라고 하죠.”

‘바세린 땀 차단설’은 포기해야 하는가? 관장님한테 더 물어봤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세린을 눈썹 위에 가로로 바르면 땀이 옆으로 흘러내리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땀을 훔치거나 하면서 상대방에게 빈틈을 노출하는 경우를 피하게 되잖아요.”

“땀이 눈에 들어오면 가드를 올린 상태에서 글러브로 훔쳐내죠. 땀은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눈에 덜 들어오기는 하겠네요.”

여하튼 바세린은 운동할 때 머리에서 땀이 많이 나는 사람이라면 발라봄직하다. 눈썹 위 이마에 바세린으로 완만한 팔(八)자를 그리면 된다. 수건을 이마에 동여매는 것보다 간편하다. 땀이 눈으로 덜 들어온다. 나는 최근 풀코스 마라톤에서 효과를 봤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전문기자,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cobalt@joongang.co.kr



[사진=민음사]
[자료=Maureen Dowd, The Limits of Magical Thinking, IHT, 25 Oct.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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