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루지의 모델은 디킨스 자신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진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수전노 스크루지 영감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 연극이 세계 어디에선가 올려진다. 스크루지 영감을 창조한 영국 문호 찰스 디킨스를 흠모한 작가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다. 1862년에 런던에 간 도스토예프스키는 디킨스를 만났다. 몇 년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디킨스가 들려준 말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디킨스가 말하기를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선량하고 단순한 사람은 자신이 되고 싶어한 인물이고, 악한은 자신의 과거 모습이거나 자신에게서 발견한 유형이다. 디킨스는 내게 자신이 잔인하고, 의지할 데 없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위로를 구하는 이를 적대적으로 대하며, 사랑해야 하는 사람으로부터 움츠러든다고 말했다. 디킨스는 또 ‘내 안에 두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한 사람은 사람이 가져야 할 감정을 느끼고, 다른 사람은 반대로 느끼는데, 디킨스는 반대 정서를 갖는 사람으로부터 소설의 악한 인물을 창조한다고 들려줬다.”

누군가에게 뉴욕타임스(NYT) 국제판, 즉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에서 읽을 만한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하다가 비로소 알게 됐다. IHT에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기사가 많다는 점을. IHT는 현존 인물이 아닌 역사 속의 인물을 자주 다룬다. IHT에서 독자적으로 인물을 조명할 때도 있지만, 대개 새로 전기가 나오면 그 책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러니까 IHT가 역사적인 인물 기사를 많이 싣는 건 평전이 그만큼 많이 출판되기 때문이다. 평전은 왜 많이 나오나. 출판시장에서 평전을 계속 낼 만큼 인물 책이 읽히는 덕분이다.

IHT에서 지난 몇 개월 동안 내가 서평을 보고 관심을 둔 전기만 해도 10여 종에 이른다. 인물은 스티브 잡스에서부터 칼 막스, 반 고흐, 어네스트 헤밍웨이, 커트 보네거트, H.G. 웰즈, 예카테리나2세, 윈스턴 처칠, 코코 샤넬 등이다.

반면 국내 출판계에는 평전이 드물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을 제외하면 재조명되는 역사 속 인물이 거의 없다. 인물 책은 회고록과 자서전이 주종을 이룬다. 전기가 나와도 대개 조명을 밝은 쪽에 비춘 책이다. 디킨스나 스티브 잡스 평전처럼 어두운 면도 가감 없이 드러낸 전기는 찾기 어렵다.

한국 사회는 왜 전기가 적게 나올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사람을 그리다>에서 한국 사회가 인물평을 꺼린다며 이는 ‘아무개는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어’ ‘아무개는 좋게 말하는 사람이 없어’라는 어법에서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사람을 인물평을 할 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수를 내세워 소극적으로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어떤 인물의 전기를 쓰려고 하는 필자에게 실명으로 나서서 사실을 제시하면서 해당 인물을 비판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얘기다. 자연히 입체적인 평전이 나오기 어렵다.

그러나 이 분석은 부분적으로만 설명력을 지닌다. 한국 사회의 실리주의가 다른 원인이다. 한국에서 전기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다수의 인물에 대한 관심이 자신의 이해타산에 국한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다수는 저마다 살기 바빠서, 더 잘 사는 데 과거 인물이 도움이 되지 않아서, 지금 내 이해관계에서 어떤 인물을 파악하면 그만이지 그의 좋은 점과 함께 나쁜 점을, 그의 약점 외에 강점을 동시에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평전을 찾지 않는다.

한국의 인물 비평이 우회적이라는 분석 또한 과거의 이야기가 됐다. 과거 미디어의 인물 기사는 대개 무난했다. 해당 인물이 꺼리는 대목은 쓰지 않거나 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인물에 대한 얘기가 지나치게 직설적이 됐다. 신랄한 수사법을 동원해 인물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일이 잦아졌다. 소셜 미디어가 새로운 영역을 먼저 개척하자 기존 미디어가 대응한 것일지 모른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한국 사회의 인물 비판은 파편적이다. 정치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 주도하는 편파적인 비평이 판치고, 종합적인 평가는 덜 나온다.

문제는 ‘외눈박이’ 인식이 확산되는 데 있다. 편을 가른 뒤 편에 따라 인물을 단순하게 재단하는 사회는 점점 더 분열된다. 의견 차이의 골이 깊어지고 넓어진다. 간접적으로라도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경험을 하지 않는데, 직접 관련된 사안에서 어떻게 반대편과 이견을 좁히랴. 한국 사회가 한 뜻이 되는 때를 월드컵 외에는 찾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럽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전문기자,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cobalt@joongang.co.kr


[사진=아이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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