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함으로 분위기 압도한 ‘사바하’의 심층적 세계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사바하>가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오컬트물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 <검은 사제들>을 통해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던 장재현 감독이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불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오컬트물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기괴함으로 분위기를 압도한다. 과연 장재현 감독의 영화답게, 종교적인 상징을 빼곡히 담아 세계관을 구성했다.

오컬트물은 신이나 악령 같은 초현실적인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들이 작동하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구현해야 하는데, 그 세계가 얼마나 정합적이고 세밀하고 깊이 있는지가 오컬트물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사바하>는 그런 측면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검은 사제들> 보다 더 뛰어나고 심층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데, 흔히 알려지지 않은 불교적인 설화와 상징들을 정교하게 배치하고 풍부하게 활용함으로써, 장르의 팬들을 열광시킬 만한 콘텐츠를 만들었다.

영화 <사바하>는 중반까지 매우 탄탄한 흐름을 자랑한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감독이 지닌 세계관의 빈틈이 드러난다. 그 빈틈은 다름 아닌 여성관이다.



◆ 박목사를 따라 사슴동산에 들어서다

영화 <사바하>는 동물의 울음소리와 아기 울음소리가 버무려진 가운데, 금화(이재인)의 섬뜩한 나레이션을 들려주며 시작된다. 1999년 강원도 영월에서 가정 분만으로 쌍둥이가 태어났다. 첫째는 검은 털로 뒤덮인 괴물이고, 둘째는 다리에 상처를 지닌 금화였다. 의사는 괴물이 곧 죽을 것이라 했지만, 죽지 않았다. 대신 엄마, 아빠, 삼촌이 잇달아 죽었다. ‘그것’은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채, 헛간에서 살았다. 밤마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나기를 여러 번, 새로 이사 온지 며칠 만에 동네의 소들이 죽어나가자 무당은 큰 굿을 벌인다.

한편 영세한 종교연구소를 운영하며, 사이비 종교나 신흥 종교를 고발하는 글을 써서 돈벌이를 하는 박목사(이정재)는 그의 수하 요셉(이다윗)과 함께 불교계 신흥교단인 사슴동산을 취재 중이다. 사슴동산의 법당 앞에서 우연히 경찰과 마주친 박목사는 사슴동산이 여중생 변사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낸다. 박목사는 사슴동산의 핵심인물인 정나한(박정민)의 뒤를 쫓다가, 사슴동산이 수십 년 전에 사라진 동방교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는 박목사를 통해 사슴동산이라는 교단의 실체에 접근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박목사는 목사출신이지만 다분히 세속적인 인물로,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그는 신의 존재를 회의하며, 광신을 혐오한다. 요셉이 “살아계신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그러나 그는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이 왜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지 회의하며 “진짜”를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유신론자이다. 신앙을 버린 목사이자 신의 존재를 희구한다는 점에서, 그는 오컬트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할 최적의 인물이다.

그의 안내를 따라, 사슴동산의 세계가 열린다. 평범해 보이는 법당에 비밀공간이 존재하고, 그 비밀공간을 둘러싼 거대한 탱화가 모습을 드러낼 때, 쫄깃한 흥분이 관객의 뇌리를 휘감는다. 눈 덮인 외길을 따라 호젓하게 등장하는 녹야원의 평화로움은 또 어떤가. 박목사는 그의 친구 해안스님(진선규)의 자문을 받아, 불교에서 사천왕의 의미와 밀교의 불로불사의 이념에 대해 듣는다.

본래 악신이었으나 부처를 만난 뒤 악귀를 쫓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천왕처럼, 정나한은 원래 소년범이었으나 교주 김제석을 만난 뒤 그를 지키는 영적 군인이 된다. 그는 김제석을 해칠 자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수많은 살육을 벌인다. 그러나 그가 또 다른 존재 ‘그것’과 만나면서, 그의 칼끝이 방향을 바꾼다.



◆ 미륵과 ‘그것’이 이루는 대칭

“불교에서는 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죽으니 저것도 멸한다.” 영화 속 이 대사는 불교의 세계관을 들려주는 진언이자, 영화의 복선을 이루는 핵심 문장이다.

영화 <사바하>는 김제석과 ‘그것’을 대비시킨다. 김제석은 “진짜”이고, 깨달은 자이다. 그는 불로의 경지에 오른 ‘미륵’이다. 반면 ‘그것’은 괴물이자 귀신이다. 사악한 모습으로 태어나 비천하게 살고 있다. 흰옷을 입은 김제석과 검은 털로 뒤덮인 ‘그것’은 기독교적인 이분법으로 보면 명확히 선악으로 구분된다. 심지어 ‘그것’은 뱀을 부리는 자이고, 김제석을 죽일 자라는 티벳 고승의 예언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선악은 서로 꼬리를 물고 있으며,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정나한이 ‘그것’을 만나는 장면은 흡사 <곡성>에서 카톨릭 부제가 동굴에서 악마를 만나는 장면에 비견될 만큼 지독한 역설을 품는다. ‘그것’은 털을 벗고 여래 좌상의 자세와 수인(손동작)으로 그를 맞는다. “나는 울고 있는 자이니라.” 기독교에서 뱀은 사탄을 상징하지만, 불교에서 뱀은 수행자를 돕는 자이다. 석가의 머리 위에서 비를 막아주는 코브라의 형상이나, 허물을 벗고 새로운 존재가 되는 행위가 깨달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의 품에서 진정으로 거룩함을 느낀 정나한은 사천왕답게 진정한 악귀를 처단하러 나선다.

김제석을 죽일 자로 태어난 ‘그것’이 여래와 같은 형상으로 화한 것은 ‘미륵’이었던 김제석이 흑화된 것과 정확히 대비된다. 김제석은 깨달은 자였으나, 불사(不死)에 대한 집착과 미망으로 살육을 벌이는 자가 된다. 반면 ‘그것’은 비천한 존재였으나, 존귀한 여래로 거듭난다. 이 변화에 금화의 자비심이 작용하였다. 금화는 자신의 삶을 발목 잡아온 ‘그것’을 죽이려다 독이 든 밥그릇을 차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벗어서 건넨다. 허물을 벗은 ‘그것’이 금화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그의 변신에 금화의 자비와 보시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는 곧 죽는다. 김제석을 죽이는 존재로 태어난 자이기에, 김제석의 죽음과 함께 그도 소멸한 것이다. 태극처럼 맞물린 모순적 관계로 둘이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 여아살해와 정나한을 그리는 방식

영화 <사바하>는 실로 끔찍한 사건을 담는다. 여아 연쇄 살인이라는 설정은 신화적으로는 헤롯왕의 영아살해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20세기 후반의 한국에서 자행되었던 ‘여아낙태’와 <살인의 추억> 이후 수많은 범죄물에서 다루어온 여성에 대한 납치, 강간, 살해를 연상시킨다. ‘여아낙태’ 이든 ‘여성 대상 범죄’ 이든 결론은 ‘페미사이드’(여성 살해)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경찰서 벽에 꽂혀있던 미제사건 전단지들이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는 순간 일순간에 뜯겨져 나가는 장면이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여자아이들 수십 명이 죽거나 사라지는 동안 사건이 사회적으로 인지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소녀들의 죽음과 실종은 그만큼 흔하고 가출이나 인신매매 등의 미궁으로 쉽게 빠지는 탓에 미제사건이 되기 쉽고 경찰이나 언론의 특별한 주목을 받기 힘들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만약 소녀가 아닌 소년이 그만큼 죽거나 사라졌다면 주목받지 못한 채 16년을 끌어왔다는 설정이 가능했을까. 영화는 뚜렷한 여성 살해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까지 덤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중이다.



영화는 무고하게 살해된 여아들의 억울함을 정나한이 겪는 악몽 속의 검은 형상을 통해 그려 보이고, 박목사와 정나한의 대사를 통해 언급한다. 그러나 영화가 그런 끔찍한 범죄의 실행자인 정나한을 다루는 방식은 의아하다. 정나한은 살부의 죄로 소년원에 수감된 후 김제석에게 거두어져 사천왕으로 키워진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세계를 구하는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수행자의 자아를 비춰보는 거울이라 할 만한 코끼리의 눈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코끼리의 눈이 추워 보인다고 말할 정도로 지독한 고독과 싸워야 했다. 밤마다 울부짖는 원혼으로 인해 잠 못 이루었고,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잠재우는 것은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였다.

영화는 굳이 정나한이 사창가 출신이며, 그의 엄마는 창녀이고 그의 아버지는 포주이거나 양아치였다고 언급한다. 여아 살해를 하고 돌아온 쓸쓸함과 번뇌를 창녀이자 엄마가 부르는 자장가 소리에 의탁해 겨우 위로받는 남성 주체라니,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여기에 금화의 초경을 존재의 발화기점으로 삼는 발상이나 여래가 된 ‘그것’이 어머니가 부르던 자장가를 다시 들려줌으로써 정나한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것 역시 여성을 모성으로 치환하고, 모성을 다시 신성으로 등치시키는 남성 중심적 클리셰에 가깝다. 결국 광신에 의해 여아를 살해하는 정나한을 ‘모성을 희구하는 여린 소년’처럼 묘사함으로써, 그를 연민하거나 그에게 감정이입을 할 여지를 만들어두었다.



사실 그의 본명이 ‘나한’(법명은 광목)인 것도 영화가 그에 대해 품은 가치판단을 암시한다. 영화에는 그가 여아살해를 자행한 연쇄살인범이라는 단죄적인 시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숭고하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암시가 강하다. 그는 여래를 만나, 자신이 속아왔음을 깨닫고 다시 김제석을 향해 칼끝을 겨눔으로써 사천왕의 임무를 완수한다. 그가 친부를 죽이고 여자들을 죽이고 다시 스승을 죽이며 파란만장한 영혼의 굴절을 겪는 동안 여자들은 ‘침묵하는 양들’처럼 죽어간다.

첫 장면부터 초연한 눈빛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며, 광신에 빠진 할머니에 대해 냉랭한 표정을 보이던 금화가 가출을 결심하면서 하필 ‘랜덤 채팅’을 하고, 종교적인 신념으로 자신을 납치하여 죽이려는 정나한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죽어주려는 것을 어찌 보아야 할까. 단지 생에 대한 미련이 없기 때문으로 해석한다면, ‘랜덤 채팅’은 생에 대한 미련이 없는 소녀의 ‘막 살기 위한 자학적 일탈’로 보아야 할까. 그렇다면 감독의 여성관이 너무 투명하게 드러난다.



여성은 모성을 통해 신성에 다다를 수 있지만, 자신을 놓아버림으로써 성적 타락에 빠지는 존재라는 뜻인데, 이를 간단히 줄여서 ‘어머니와 창녀의 이분법’ 이라 부른다. “불교는 기독교적인 이분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영화 스스로 천명하지만, 영화는 ‘어머니와 창녀의 이분법’을 버리지 못해 비릿한 ‘여성혐오’를 드러낸다. 종교가 무엇이든, ‘여혐’의 신화와 이데올로기는 이토록 유구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사바하>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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