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나타나 행복 바이러스 전파한 ‘할담비’에게 감사를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뜬금없이 텔레비전에 나타나 판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심심하고 지루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탬버린을 흔드는 <담다디>의 이상은이 있었고, 1992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로 무대를 흔들었다. 세기말에는 손가락 마이크에 부채를 든 이정현이 <와>를 부르며 신들린 무대를 선보였다. 그 후에도 종종 TV 속의 누군가는 판을 흔들며 전국을 들썩들썩 춤추게 만들었다.

하지만 2019년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판을 흔드는 사람이 등장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KBS <가요무대>처럼 시청률은 좋아도 크게 화제는 되지 않는 소박한 장수프로가 바로 <전국노래자랑>이었다. 그런데 3월 24일의 <전국노래자랑>은 한 70대 출연자의 <미쳤어>이후 연말 가요대상이나 엠넷의 MAMA보다 더 화제가 되고 있다.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너무 미워서 떠나 버렸어.”

지병수 할아버지가 손담비의 2008년 히트곡의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이미 <미쳤어>는 다른 노래로 바뀌었다. 그건 70대의 노인이 뜬금없이 여가수의 섹시 댄스 노래를 부르는 코믹한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지병수 할아버지는 막춤에 고성방가를 밀고나가는 출연자가 아니었다. 그는 <미쳤어>를 자기만의 춤선과 리듬감으로 다시 소화했다. <미쳤어>의 댄스하면 떠오르는 의자나, 엉뚱한 몸개그는 그에게 필요 없었다. 하회탈 미소와, 귀여운 춤선, 할아버지 목소리에 어울리는 특유의 리듬감이 충만한 출연자였으니 말이다. <전국노래자랑>의 방청객들은 순식간에 지병수 할아버지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유쾌한 매력과 프로페셔널한 춤 솜씨와 리듬감에 빨려든 것이다. 지병수 할아버지의 <미쳤어>는 그렇게 유쾌하고 기분 좋게 판을 흔들었다. 곧이어 그는 1990년대를 연 댄스곡 나미의 <인디안 인형처럼>부터 90년대 후반을 마무리한 박진영의 <허니>까지 들려주며 우리를 달콤한 흥의 추억에 잠기게 만들었다.

지병수 할아버지가 등장한 <전국노래자랑>의 <미쳤어> 영상은 곧바로 유튜브를 통해 모두의 스마트폰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지병수 할아버지는 ‘지담비’·‘할담비’라는 별명을 얻으며 순식간에 유명해졌고 가수 손담비와 합동 무대를 펼치기도 했다.

할담비의 <미쳤어>는 뭔가 사람을 기분 좋게 취하게 만드는 중독의 마력을 발휘했다. 더구나 우리 국민들은 지난 몇 달 뉴스에 등장하는 미세먼지보다 못한 미운 사람들 탓에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들의 뻔뻔한 소식들이 알려질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던 사람들에게 할담비의 <미쳤어>는 잠시나마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무공해 활력소였던 셈이다.



화제의 인물인 만큼 곧바로 미디어를 통해 할담비의 살아온 생애까지 기사화 되었다. 할담비는 사업에 실패했고, 지금은 기초수급생활자로 살아가는 종로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밝게 오늘의 인생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할담비의 <미쳤어>에서 느껴지는 그 밝은 에너지는 어쩌면 그의 인생관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중독성 강한 할담비의 <미쳤어>를 보고 또 보다 보면 문득 3월의 천사 같은 그에게 인사라도 남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미세먼지 가득한 3월에 잠시나마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셔서.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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