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우린 그동안 김윤석을 절반 정도만 알고 있었나 보다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최근 시사회를 가졌던 <미성년>은 올해 들어 본 한국 영화 중 가장 재미있게 본 작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정보가 주는 염려를 깨고 그 기대를 만족시키는 작품이기도 했다.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고 야심도 크지 않지만 갖고 있는 재료와 능력을 최대한 영리하게 활용한 작품이라고 할까.

우선 염려를 보자. 우린 김윤석과 같은 나이 또래의 한국 남자 ‘명배우’에 대해 갖고 있는 상이 있다.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보는 자의식 과잉의 중년남자가 거창하게 자신의 고통과 울분을 터트리는 과정을 그려보라.

<미성년>이 이런 중년남자 중심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우긴다면 그건 거짓말이 될 것이다. 이 영화가 배우 김윤석의 기존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해도 거짓말이 될 것이다. 이 영화의 드라마와 인간관계는 바람난 아버지 김윤석 캐릭터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이 캐릭터는 김윤석의 옛 일일연속극 불륜 남편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은 의외로 예상했던 것과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김윤석이 자신의 캐릭터를 의식적으로 최대한 억누른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남자 어른의 이야기가 될 생각이 없다. 두 여자 고등학생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에 중요한 건 그들의 어머니들이다.

여기서부터 김윤석은 익숙한 독백을 늘어놓는 대신, 자신의 영역 밖으로 뛰어든 탐사가가 된다. 이 탐사의 영역은 원작인 이보람의 미공개 희곡이다. 정식 공연된 적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에 이보람 작가와 김윤석 작가가 어느 정도 분담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의외로 김윤석의 개입으로 보이는 것들이 이보람의 원래 해석일 수도 있는 것이다. (김윤석에 따르면 재미있는 대사의 70퍼센트는 이보람의 것이라고 한다).



결국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몇몇 관객들은 몇몇 한계들, 그러니까 고등학교 묘사의 디테일 문제 같을 것을 지적한다. 나는 그가 캐릭터를 충분히 막 다룰 수 있는 지점에서 예의바르게 멈추어 선 게 아닌가 의심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 큰 그림을 보았을 때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장점이다. 김윤석은 수십 년의 무대 연출과 연기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일해 봤고 수많은 텍스트를 다루어 본 경험을 통해 <미성년>이라는 콘텐츠를 조율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성년>은 어른 전문 예술가의 작품이다. 자신의 직접 경험 영역 바깥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들과 대화가 가능하며 그들을 살아 숨쉬는 3차원적 인물로 볼 수 있는 사람의 작품이다. 두 고등학생 주인공 윤아와 주리는 거의 장르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몇몇 설정들로 이루어졌다. 사실 한국 영화 고등학생들 대부분이 그렇다. 열의가 없는 사람들은 이런 인물들을 그릴 때 그 전형성을 기운 없이 되살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럴 때 가장 자주 차용되는 것이 바로 <여고괴담> 클리셰이다. 하지만 윤아와 주리는 <여고괴담> 시리즈의 어휘를 종종 사용하면서도 이들에 갇히지 않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이 익숙한 (그러니까 비공식적으로 엮기 좋은) 길을 따르더라도 이게 자유의지를 가진 극중인물들이 통과한 투쟁의 결과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기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배우 감독에게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배우들의 활용인데, <미성년>은 거의 모범적이다. 이 영화에는 명연기의 스턴트는 없다. 하지만 베테랑과 신인 모두 적절하게 캐스팅되었고 이들은 다른 배우들과 아주 잘 어우러진다. 기대를 넘어선 부분은, 영화가 배우를 잘 쓰는 것을 넘어서 그 배우가 가진 매력을 아주 훌륭하게 살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염정아가 <미성년>에서처럼 아름답게 나온 작품을 최근 몇 년 동안 본 적이 없다. 이는 메이크업이나 조명과는 별 관계가 없다. 일상의 섬세한 디테일과 캐릭터를 섞어 배우가 최대한 빛날 수 있게 한 배려의 힘이 더 크다. 마찬가지로 김소진의 특유의 말투나 표정을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쓴 영화도 전에 못 본 것 같다.



앞에서 말했지만 <미성년>은 야심 없는 소품이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영상 매체를 통해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존재와 개성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겐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게 해준 깜짝 선물과 같은 작품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에게 주어진 역들은 예술가 김윤석을 절반 정도만 담고 있었나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미성년>스틸컷, 메이킹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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