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이 사람으로 거듭나 하늘이 되다
4분의 1 지점을 돌아온 SBS ‘녹두꽃’ 중간점검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각 방송사들이 앞다퉈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2019년, SBS가 기념작으로 선보인 드라마 <녹두꽃>의 선택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시간을 100년보다 조금 더 앞당겨, 125년 전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만들자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주목한 것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그 시대에 집중하는 대신, 그처럼 주어진 현실에 마냥 좌절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들고 일어나 싸우는 민중의 힘 자체를 그림으로써 그 정신의 연원을 찾는 쪽을 택한 셈이다.

작품이 1/4 지점을 돌아온 지금, [TV삼분지계] 또한 흥미로운 눈으로 작품을 들여다보았다. 이승한 평론가는 <녹두꽃>을 ‘퓨전사극의 미장센을 빚어온 신경수 PD와, 정치극 서사에 강한 정현민 작가의 만남’의 관점으로 기술적인 부분을 검토했다. 정석희 평론가는 불평등과 사회격차의 측면에선 125년 전과 지금의 한국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며 <녹두꽃> 속에서 우리는 어떤 캐릭터일까 돌아보았고, 김선영 평론가는 끝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동학농민혁명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로 백이강이 짐승에서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목했다.



◆ 아직까지는 다 어우러지지 못한 정현민의 서사와 신경수의 영상

정현민 작가와 신경수 PD가 만난 <녹두꽃>은 그 기획부터 흥미롭다. 두 사람은 정도전의 조선 개국 서사를 다룬 정통사극 KBS <정도전>과 퓨전사극 SBS <육룡이 나르샤>로 각기 다른 장기를 보여준 바 있는데, 덕분에 <녹두꽃>은 같은 시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던 두 사람의 조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각기 다른 정치적 신념을 지닌 인물들이 치열하게 생각으로 합을 겨루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그리는데 능한 정현민 작가는, 동학군이 고부에서 처음 봉기했다가 무장으로 퇴각, 다시 세를 불리며 고부를 지나 정읍 황토현까지 밀고 올라가는 큰 서사를 다루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인물들의 성장과 변화를 꼼꼼하게 담아낸다.

극이 1/4 지점을 지나는 지금, 시청자들은 전봉준(최무성)과 황석주(최원영), 전봉준과 백이현(윤시윤)의 대화를 통해 각자가 품은 ‘좋은 정치’의 비전들이 충돌하는 장면들을 목격했고, ‘백가네 개 거시기’가 백이강(조정석)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함께 지켜봤다. 퓨전 사극 특유의 감각적 미장센을 선보여 온 신경수 PD의 연출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도 있다.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재현해 낸 장면이나, 전봉준과 백이현의 대화 장면에서 두 사람의 대립구도가 도드라지도록 구성한 화면구도 등은, 신경수 PD가 영상언어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연출가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다만 아직까지는 두 사람의 장점이 완전히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SBS <뿌리 깊은 나무>나 <육룡이 나르샤>를 통해 액션 신에 무협지적인 요소들을 도입해 왔던 신경수 PD는 여전히 액션 신을 최대한 감각적이고 스케일 있게 담아내는데 집중한다. 버들이(노행하)가 얼마나 훌륭한 스나이퍼인지, 번개(병헌)가 얼마나 새총에 능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사극이라기보단 블록버스터 전쟁영화나 액션영화 <원티드>(2008)의 영상문법에 가깝게 연출됐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연출이지만, 칼보단 보습을 드는 데 더 익숙했던 동학군이 힘을 모아 전투에서 승리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전투 신을 보여주는데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동학군이 전주를 탈환할 쯤엔 두 사람의 장점이 보다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 125년 전과 다르지 않은 오늘, 저 중에 나는 누구일까

<녹두꽃>이 전환점을 맞았다. 아버지 백가(박혁권)의 악행에 환멸을 느껴 집을 떠나려던 백이현(윤시윤)은 남고 백가의 가족이 되고자 발버둥을 치던 ‘거시기’ 백이강(조정석)은 집을 떠나 동학군에 합류한다. ‘거시기’가 지은 죗값을 백이강이 갚겠단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데 과연 그가 달라질까? 한번 변한 사람 두 번은 안 변할까? 전봉준(최무성)은 극악무도했던 ‘거시기’의 뭘 보고 생사를 나눌 동료로 받아들일 마음을 먹은 걸까? 한예리, 조정석, 윤시윤, 이 세 중심인물이야 언제나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연기자들이니 두 말 할 것 없겠고 백가 부인 채 씨 역의 황영희와 딸 백이화 역의 백은혜, 그리고 황석주 동생 황명심을 맡은 박규영의 연기를 눈여겨보고 있다. 빤한 설정에 자신만의 색으로 윤기를 더해 생동감을 주기 때문이다. 아울러 송자인(한예리)의 오른팔 최덕기(김상호)도 기대되는 인물. 여러 인물 사이의 연결 고리 역할이지 싶은데 의리 있고 충직하고 속 깊고, 연기자 김상호에겐 맞춤옷이다.



누군가에겐 지옥이 누군가에겐 극락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녹두꽃>의 무대인 125년 전과 작금의 현실이 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송자인이 전봉준에게 “대명천지에 그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라고 했지만 대명천지에 기막힌 사건사고들이 버젓이 벌어지는 세상이 아닌가. 어쩌면 썩은 연못의 잉어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운명에 떠밀려 토벌대가 된 백이현(윤시윤)이나 동학도들과 뜻을 함께 했으나 끝내 신분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현의 스승 황석주(최원영)가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올바른 세상을 바라지만 늘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살아가니 말이다.

정석희 방송 칼럼니스트 soyow59@daum.net



◆ 짐승의 길과 사람의 길

첫 회에서 동학농민군의 고부 봉기 신으로 엔딩을 장식한 <녹두꽃>은 9-10회에서 백산 봉기 신으로 끝을 맺었다. 첫 번째 봉기를 통해 고부 분수 조병갑(장광)은 몰아냈으나 그 밑에서 농민들을 악랄하게 수탈하던 백가(박혁권) 같은 적폐 세력들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고 이는 결국 더 큰 저항을 불러왔다. 물론 우리는 이 봉기의 끝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은 백이강(조정석)이 백가 앞에서 호기롭게 외친 것처럼 미친 세상을 확 뒤집어엎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녹두꽃>의 초점은 역사책에 박제된 결말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의도적으로 두 번의 엔딩에 거울처럼 배치한 두 차례의 혁명 신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백이강의 뒤바뀐 위치다. 고부 봉기 신에서 횃불을 든 농민들의 맞은편에 적으로 서 있던 백이강은 백산 봉기 신에서 농민들의 한가운데에 한편이 되어 서 있다. 그 사이에 그는 거시기에서 백이강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짐승의 길에서 사람의 길을 선택했다. ‘세상이 확 뒤집어’지지는 않았어도, 한 사람의 세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녹두꽃>은 이 두 차례 엔딩신의 결정적 차이를 통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은 바로 민중의 변화에 있고, 미완의 혁명은 그렇게 현재 진행의 역사로 다시 쓰여진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herland@naver.com

[영상,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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