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전’ 폭력의 아웃소싱, 그 끔찍한 정당화에 대하여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흔히 ‘묻지마 범죄’라고들 하지만, ‘묻지마’가 아닌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랜덤’이 아니라, 여성이나 노인 등 약자들에게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반문이 제기되곤 한다. 피해자가 마동석이면 찔렀겠냐고. <악인전>은 그 반문에 해당되는 상황을 실제로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악인전>은 조폭, 열혈형사, 사이코패스 등 그동안 장르영화에서 닳고 닳은 요소들을 담고 있지만, 지겨움을 절묘하게 피해간다. 조폭과 형사와 사이코패스를 한 상에 차려 놓은 것도 색다른 변주이거니와, 조폭과 형사가 맺은 ‘적과의 동침’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부여한다. 여기에 마동석, 김무열, 김성규가 빚어내는 극한의 캐릭터 성으로 인해 굉장한 매력이 뿜어져 나온다. <악인전>은 장르의 쾌감이나 만듦새 측면에서 나쁘지 않다. 특히 수준급의 촬영과 연기가 서사의 빈 구멍을 많이 메워주기 때문에, 다소 개연성이 헐거워질 때도 재미를 유지한다.

영화는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 받았으며, 이미 104개국에 선 판매됐다. 또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하기로 결정됐으며, 마동석이 주연과 프로듀싱을 맡을 예정이다. 이는 <악인전>과 마동석의 매력이 해외에서도 먹혔다는 방증이다. 요컨대 영화는 국내외를 들썩이게 할 만큼 대중영화로서 충분한 재미를 지닌다. 하지만 영화의 서사와 결말을 음미해보면, 비릿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단히 음험하고 경계할만한 사고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 사이코패스의 칼침을 맞은 조폭두목, 경찰과 손을 잡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찔러 죽이던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어느 날 조폭두목 장동수(마동석)을 찔렀다. ‘칼 밥’을 먹고 큰 장동수인지라, 혈투 끝에 겨우 살아남았다. 조폭의 ‘가오’를 상한 장동수는 반드시 놈을 잡아 응징하겠노라며, 자체적으로 수사에 착수한다. 한편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던 살인사건들이 연쇄살인임을 눈치 챈 형사 정태석(김무열)은 장동수를 찌른 것도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보고, 장동수를 찾아와 수사협조를 구한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동맹을 맺고 그 놈을 잡기로 한다. 조폭과 경찰이 공조한다는 설정은 언뜻 황당하게 느껴지지만, 영화는 두 사람이, 왜 그리고 어떻게, 공조에 이르게 되었는지 나름 개연성 있게 설득한다. 첫째는 둘 다 미치도록 잡고 싶기 때문이며, 둘째는 경찰은 조폭의 인력을 활용하고, 조폭은 경찰의 수사권과 시스템을 활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 <악인전>은 배우들의 매력을 십분 활용하여, 진진한 캐릭터 드라마를 펼쳐놓는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입은 마동석은 무지막지한 위압감과 더불어, 묘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조폭두목 역할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낸다. 김성규 역시 전작에서 보았던 모습과 전혀 매치되지 않을 정도로 사이코패스의 섬뜩한 눈매를 보여준다. 김무열 역시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미친개 형사의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다만 이들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수록 영화는 기이한 윤리적 딜레마로 빠져든다.



◆ 가장 덜 나쁜 조폭?

영화 <악인전>은 2005년 천안을 배경으로 삼는다. 이는 실제 사건을 참조했기 때문이다. 2005년 천안 일대에서 라재영 일당은 추돌사고를 위장해 강도 살인을 저지르는 등의 수법으로 모두 9명을 살해했다. 하지만 범인 중 한명이 여죄를 털어놓기까지, 경찰은 연쇄살인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영화는 4인조 강도 사건을 사이코패스 단독범행으로 바꾸는 등 실제사건과 달라진 점이 많지만, 경찰이 사건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은 같다. 즉 ‘잔혹한 범죄 앞에서 무력한 공권력’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는 것이다. 영화는 여기에 공권력을 보충할 강력한 행위자를 집어넣는다. 바로 조폭두목 마동석이다.

영화의 삼각구도와 ‘The Gangster, The Cop, The Devil’ 이라는 영어제목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누가 좋고 누가 이상한지는 불분명하다. 그보다는 “나쁜 놈 둘이서, 더 나쁜 놈을 잡는” 이라는 대사의 규정이 더 맞을 것이다. 조폭이야 나쁜 놈이 맞겠지만, 경찰이 나쁜 놈 맞는지 의아한 사람들을 위해, 영화는 경찰의 양아치 짓을 보여준다. 경찰은 의리도 없고 페어플레이 정신도 없으며, 사람 목숨을 중히 여기지도 않는다.



영화는 조폭이 덜 나쁜 놈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굳이 여고생 희생자를 끼워 넣으며, “아저씨가 더 조폭 같다”는 말까지 들려준다. 여고생은 이들 사이에 선악의 위계를 정해주기 위해 등장했다. 우산을 준 조폭이 가장 선하고, 경찰이 중간이며, 소녀를 죽인 사이코패스가 가장 나쁘다.

<악인전>은 ‘가장 덜 나쁜’ 조폭을 중심으로 감정선이 짜여 있다. 그가 맨손으로 사람을 때려죽일 듯 패는 장면은 우악스럽지만,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맞는 사람도 착해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그가 조폭이지만,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인상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다. ‘마블리’ 마동석의 캐스팅도 영화가 설정한 윤리적 포지션을 납득시키는데 일조한다. 결국 관객은 가장 ‘덜 나쁜’ 조폭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응원하게 되는데,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곱씹어보면, 문제가 간단치 않다.



◆ 법이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

그가 원하는 것은 범인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이다. 흔히 복수영화에서 자력구제는 용인되므로, 이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가령 <세븐데이즈>에서 주인공은 범인을 무죄판결로 빼낸 뒤 고통스럽게 죽이는데, 이는 법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악인전>은 일반적인 복수영화와 달리, 법의 권위를 흠집을 내지 않는다. 조폭이 경찰과 힘을 합쳐 범인을 잡고, 자력구제는 경찰에 의해 제지당한다. 심지어 조폭은 체포될 위험을 감수하고 법정에 나와 증언을 한다. 영화에는 법의 한계나 거추장스러움이 자주 언급되지만, 법은 우회되지 않으며, 다만 폭력에 의해 보충된다. 영화에서 법과 폭력은 상보적 관계에 놓여있는데, 이것이 진짜 문제가 된다.



영화 속 법정 장면은 엄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조폭의 증언은 피해자로서 느낀 감각과 정서로 버무려져있다. 변호사가 그것은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하자, “당신 가족이 당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라는 말이 날아든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힘이 느껴지는 이유는 마동석의 육체를 경유했기 때문이다.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려던 범인은 조폭의 진술로 유죄를 확정 받는데, 이 과정에서 조폭은 법을 보충하고, 관객은 그를 응원하는 구도가 유지된다.

그런데 여기서 조폭이 얻은 것은 뭘까. 경찰은 범인을 잡아 승진하고, 조폭까지 잡아넣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실질적인 승리자는 경찰이다. 조폭은 많은 것을 잃었지만, 범인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유일하게 얻는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교도소에 입성한 조폭이 범인을 죽일 것임을 암시하는 영화의 결말은 조폭을 최후의 승자처럼 보이게 하며, 이러한 해결이 통쾌하고 합당한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러한 쾌감이 정확히 무엇인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 폭력의 아웃소싱

범인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사형은 집행되지 않는다. 한국은 실질적인 사형폐지국가이기 때문이다. 범인도 이를 언급하며 웃는다. 조폭은 더 이상 국가가 하지 않는 사형집행을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법이 하지 않는 ‘더러운’ 일을 그가 대신 하는 것에 관객은 은연중에 동의하게 된다. 즉 진짜로 나쁜 놈에 대해서는 사형이 좀 집행되길 바라고, 피해자의 이름으로 직접 응징할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관객의 원초적인 법 감정에 영화가 편승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사이코패스 살인자는 사형선고를 받고, 조폭도 법의 심판을 받는다. 즉 법은 전면에서 온전히 작동하고, 폭력은 뒤에서 보충적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굉장히 위험하지 않은가. 영화에서는 마침 사이코패스 살인자를 죽이는 일에 법과 폭력이 뜻을 함께 했지만, 법과 폭력의 상보성을 용인했을 때 처단되는 것은 사이코패스 살인자만이 아닐 것이다. 가령 정규군이 못하는 난민 학살을 민병대가 해주길 바라고, 경찰이 못하는 철거민 폭행을 용역이 해주길 바라는 식의 변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영화는 범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조폭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는 두 번의 응징을 통해 법과 정의가 승리한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여기에 ‘마블리’의 이미지와 여고생의 일화까지 집어넣어 폭력의 대리자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안심시키며,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들, 법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말을 통해 조폭을 법의 빈 구멍을 메우는 존재로 사고하게 만든다.

<악인전>을 보고 후련함을 느낀다면 그건 대단히 음험한 감각일 것이다. 조폭이 아무리 나빠도 사이코패스 범죄자보다는 낫다는 그 감각은 내가 아무리 나빠도 ‘저런 놈’ 보다는 낫다는 감각으로 쉽게 전이된다. ‘저런 놈’의 위치에 무엇이 놓일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도덕의 하향평준화와 도덕의 아전인수를 통해, 스스로를 ‘법을 보충하는 폭력’으로 인식하는 자는 못할 짓이 없다.

영화가 재미있고 배우가 매력적이라는 점을 십분 동의할지라도, 아니 동의할수록 더욱 영화의 메시지가 품은 비릿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가 잔인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영화가 통쾌함을 가장하기 때문에 괴롭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악인전>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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