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세습자본주의의 민낯이 신랄할수록 허무의 그림자는 짙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고 했던가. 봉준호 감독은 가장 한국적인 영화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물론 여기서 ‘한국적’이라는 말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한국적’이라는 말과 다른 의미다. 전자가 한국의 전통 미학을 계승한다는 뜻이라면, 후자는 한국의 현실적 모순을 그대로 담았다는 뜻에 가깝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에는 당대의 한국 사회에 대한 풍자와 역설이 가득 차 있다. <설국열차>와 <옥자>는 봉준호의 문제의식을 글로벌한 지평으로 넓혀, 계급사회의 메커니즘과 자본의 생태적 착취를 노골적으로 담았다. 하지만 두 작품은 구체적인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우화적인 작품이기에, 다소 공허한 감이 있었다.

<기생충>은 봉준호의 영화적 궤적이 변증법적으로 합일된 작품이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와 풍경과 정서를 통해, 가장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자본주의의 모순을 그린다. 즉 자본주의의 모순이 가장 응축된 한국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을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시대적 실상을 도해한다. 봉준호는 1980년대 대학에서 받아들인 세계관을 장르영화의 틀 안에서 풀어내는데 능한데, 필모그래피를 쌓을수록 문제의식이 희석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또렷해진다. 또한 과거의 시대정신을 회고하거나 정전으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사회의 모순에 녹여내면서 끊임없이 현재화 하는 방식을 취한다.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탄 것에 대해 국가적으로 환호하거나 개인의 영광일 뿐이라며 일축하는 것은 둘 다 일차원적인 반응이다. ‘국뽕’ 이나 ‘쿨내’를 넘어 주목해야 할 것은 봉준호의 영화세계가 거울처럼 한국 사회를 비추고 있으며, 그 거울을 통해 세계인들이 동시대적인 모순에 공감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한국인에게는 거울이요, 세계인들에게는 창문과도 같은 <기생충>을 통해,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처절한 희비극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 상징과 복선들

영화 <기생충>은 뚜렷한 상징을 통해, ‘기생충이 된 인간’을 보여준다. 여기서 ‘된다’는 판타지적인 설정을 뜻하지 않는다. 즉 카프카의 <변신>에서 갑자기 벌레가 된다거나, 좀비 영화에서 좀비로 변하는 식의 과정이 필요 없다. ‘기생충 같은 인간’을 거쳐, 기생충처럼 생각하고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기생충의 내면과 삶의 양식을 체득한 존재’로 화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영화는 두 가족이 얽히는 블랙코미디로 출발하여 좀비 없는 좀비활극을 거쳐 기이한 정신승리의 부조리극으로 끝맺는다. 하지만 이러한 변천이 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충분한 암시와 복선을 통해, 서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즉 현실적 개연성 보다는 내적 필연성으로 인해 서사에 설득력이 부여된다.



가령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기정(박소담)과 기우(최우식)는 공짜 와이파이를 잡느라 분주하다. 가장 흔한 ‘기생’의 행태이다. 기택(송강호)은 곱등이를 치우는데, 곱등이는 원래 연가시의 숙주로 유명하다. 골목에 소독차가 오자, 소독도 할 겸 창문을 닫지 말자고 했다가 온가족이 콜록거린다. 이는 박멸되어야 할 해충이 이들 가족임을 암시한다. 이들의 미래는 “불을 켜면 도망가는 바퀴벌레 같지 않냐?”는 충숙(장혜진)의 말로 재확인된다. 박사장(이선균)네 마룻바닥을 자벌레처럼 기어서 빠져나와, 비를 쫄딱 맞고 집으로 향하는 꼴은 영락없는 시궁쥐를 연상시킨다.

수석 역시 명확한 상징이다. “재물운과 합격운을 가져다 준다”는 수석이 집안에 들어온 뒤, 이들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게 행운이었을까. “이게 나를 쫓아다닌다.”고 말하던 기우는 마침내 돌을 들고 계단을 내려간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까지 완벽한 계획이 있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돌은 그의 손을 떠나 아래로 굴렀고, 마침내 그의 머리가 돌에 짓이겨 진다. 이것은 앞서 노상방뇨 하는 사람에게 물을 뿌리려던 기우가 아버지가 뿌린 물을 덮어쓰는 앞 장면을 통해 암시된 미래이다.



◆ 지하 냄새

다송(정현준)은 진실을 아는 자이다. 다송은 문광(이정은)의 남편을 반복해서 그리고, 그가 보내는 모스 부호를 읽을 줄 안다. 그는 기택 가족에게서 같은 냄새를 맡는다. 그가 맡는 것은 물질적 자극일 뿐이지, 그것이 지하의 냄새이자 가난의 냄새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박사장은 유독 기택에게서만 냄새를 맡는다. ‘캐빈 선생님’과 ‘제시카 선생님’은 두고, “지하철 타고 다니는 사람” 임이 확실한 기택의 냄새만 감지한다. 냄새를 맡지 못하던 연교(조여정)도 박사장의 말을 들은 뒤 냄새를 의식한다. 심지어 창문을 열고, 급기야 차문을 박차고 나온다.

결국 냄새가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계급은 사회적 관계의 문제지만, 냄새는 몸에 베인 존재의 문제다. 즉 냄새는 계급을 넘어 인종의 문제가 된다. 실제로 냄새는 인종 혐오의 단골 소재이다. 타자에 대해 역겹게 느끼는 몸의 반응이 “저 사람 몸에서 (김치/카레) 냄새가 난다.”는 말로 요약된다. 만약 그 사회에서 한국인이나 인도인의 포지션이 높다면, 김치냄새와 카레냄새가 그리 역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하냄새는 어떤가.



영화는 지하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상세히 알려준다. 영화는 공간의 위계를 통해 계급을 뚜렷하게 대비시킨다. 마치 <설국열차>의 꼬리 칸과 머리 칸이 그러하듯, 영화는 박사장의 저택과 기택의 반지하 집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물난리를 겪던 밤 교차 편집으로 두 집을 대비시킨 것도 모자라, 이튿날 “미세먼지가 없어져서 너무 좋다”는 말까지 들려준다. 한편 기택은 지하에 사는 문광의 남편을 보고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느냐?”고 반문한다.

영화에서 지상, 반지하, 지하는 단지 물리적인 공간의 차이가 아니라, 계급을 환유한다. 원래 ‘지하실 냄새’는 햇빛이 들지 않는 습한 환경에 서식하는 곰팡이와 미생물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냄새지만, 거주지가 곧 계급을 말해주는 ‘부동산 계급론’에 의해 ‘가난 냄새’라는 기의를 얻는다. “그는 선을 넘지 않지만, 냄새가 선을 넘지” 라는 박사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상대가 아무리 선을 지켜 행동해도, 그의 존재가 혐오를 부른다는 뜻이다. 상대의 냄새에 코를 막는 행동은 가장 극명한 혐오 표현이다. 박사장이 코를 틀어막자, 기택은 드디어 선을 넘는다.



◆ 좀비 없는 좀비 활극

피칠갑을 한 채 날뛰는 문광의 남편은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데다 여러 끼니를 굶었을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좀비에 가깝다. 사회적인 삶을 박탈당한 채 기생충처럼 살고 있던 그는 조지 로메로가 주목했던 좀비의 하층민적인 특징을 그대로 갖는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이곳에서 태어난 것 같다”고 말하던 그는 자신의 숙주인 아내가 죽자 피의 자극을 받아 지하 무덤을 깨고 튀어나온다.

폭주하는 그를 관통한 꼬챙이의 끝에 소시지가 매달려 있고, 그것을 개들이 뜯어먹는 장면 역시 내장을 파먹는 좀비 활극의 변형이다. 박사장의 코를 틀어막는 행위는 그가 공포의 대상(살인자)이 아닌 혐오의 대상(좀비)임을 뜻한다. 그런데 좀비가 무서운 진짜 이유는 감염이 되기 때문이다. 광기는 기택에게로 옮겨 붙는다.

기택은 자신이 문광의 남편과 자신이 다르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다를 바가 없다. 같은 경로로 망하고, 지하에 살기는 마찬가지이다. 박사장네 음식으로 연명하며 ‘박사장 리스펙트’를 외치며 그의 걸음에 맞춰 전등이나 켜는 그의 신세와 박사장의 발이 되고 비위를 맞추며 사는 운전기사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어쩌면 기택은 ‘같음’을 의식했기에, 더욱 ‘같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을 택했을 수 있다. 하지만 박사장의 코를 틀어막는 행위를 통해 그와 자신이 ‘같음’을 확인한 기택은 그의 행동과 존재양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 정신승리의 부조리극

좀비 활극이 끝난 뒤, 영화 <기생충>은 기우의 내레이션으로 바뀐다. 뇌수술 후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설정은 ‘여기서부터 부조리극 입니다’라는 표식이다. 영화는 부조리극임을 전제로 기우의 ‘계획’을 들려주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정신승리이다.

영화의 결말은 굉장히 암울하다. 네 명의 가족 중 기정만 죽는다. 봉준호의 영화 <괴물><설국열차><옥자>에서 딸은 희망의 상징이다. 딸이 죽더라도 딸이 품었던 아이라도 살아남는다. 그런데 하필 기정이 죽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영화는 기정이 가든파티에서 습격을 받게 되어 있다는 복선을 통해 그의 죽음을 예비하지만, 그보다 넓게 보면 기정이 가장 똑똑하고 부잣집에 어울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기정은 문서위조에 능하고, 동일한 냄새의 정체가 ‘반 지하 냄새’임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또한 문광에게 선을 긋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해 보이는데, 이는 신분질서의 상위자임을 내면화한 태도이다. 물에 잠긴 집에서 중요한 것을 챙겨야 하는 순간 그는 똥물이 솟구치는 변기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가난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현실감각과 부자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고급한 태도와 삶에 초연한 자세까지 지닌 기정에게, 영화는 어떠한 미래도 마련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



사실 파국을 피할 방법은 있었다. 가든파티 직전 기정과 충숙은 문광 부부와 연대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우에 의해 그 기회는 무산된다. 기우는 왜 독단적으로 지하실에 내려간 것일까. 그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유사 가장’으로 자신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대피소에서 그는 아버지의 무대책을 듣고, 아버지를 비난하는 대신 그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짓는다. 이는 책임을 인식한 주체의 태도이다. 스스로를 가장으로 인식한 기우는 무대책의 기택 만큼이나 큰 사고를 친다.

사건 후 기우의 우스꽝스러운 주체성은 계속된다. 기우는 수석을 자연의 자리에 갖다 놓는데, 이는 수석이 상징하는 ‘요행’을 버린다는 뜻이다. 그는 ‘요행’을 바리고, 돈을 벌어 그 집을 사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영화는 잠깐 그 계획이 실현되는 듯 한 장면을 삽입하지만, 역시나 반지하방에 앉은 기우의 판타지다. 당연하지 않은가. 영화가 내내 보여주었듯이 세습자본주의 하에서, 계급은 신분이 되었고, 가난한 자가 착실하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계획은 요행이나 속임수보다 더 허망하게 들린다. 이것은 굉장한 아이러니이다. <마더>를 보고 아들을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모성애에 감복하는 관객이 있는 것처럼, <기생충>을 보고 아들의 개심과 효심에 감동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이런 반응까지 염두에 둔 봉준호의 괴상한 농담처럼 들린다.



딸은 죽고, 아버지는 기생충이 되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와 교신했다며 효심 가득한 ‘헛꿈’을 꾼다. 어머니는 아예 존재감이 사라졌다. 이처럼 영화가 어머니와 딸을 지우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유대를 붙잡는 것은 부권적인 결말로 보이지만, 그것까지 포함하여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총체적인 부조리극으로 느껴진다. 하기야 계급이 신분이 되어버린 세습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산층은 망해서 하층민이 되고, 노동자는 혐오에 시달리다 기생충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약자끼리의 연대도 파탄 난데다, 여전히 부권적 관계가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 꿈꿀 수 있는 미래가 무엇이랴. 영화가 보여주는 세습자본주의의 민낯이 신랄할수록 허무의 그림자는 짙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기생충>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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