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먹먹한 ‘바람이 분다’, 지금부터가 진짜 이야기의 시작

[엔터미디어=정덕현] 만일 JTBC 월화드라마 <바람이 분다>를 지금부터 보는 시청자분들이라면 이 드라마에 여전히 달려 있는 ‘코 분장’ 같은 논란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듯하다. 어찌 보면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라고 여겨지지만, 어째서 초반에 그런 무리수 설정들을 보여줬는가가 의아할 정도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남자 권도훈(감우성)이 헤어진 아내 수진(김하늘)과 딸 아람이 몰래 모든 걸 정리하고 조용히 떠나려는 그 과정은 보는 이들을 먹먹하게 만든다. 우연히 딸을 만나고 온 도훈이 그 날의 기억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장면은 그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2019년 3월 23일 밤 11시 12분. 도훈아. 너의 이름은 도훈이야 권도훈. 네가 사랑하는 사람 이름은 이수진. 네 딸 이름은 아람이. 아무 것도 기억 못하겠지만 오늘은 기적이 일어난 날이라서, 도저히 잊으면 안되는 날이라서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거야. 잘 들어 도훈아. 네가 죽을 만큼 사랑하는 네 딸 아람이. 오늘은 네가 아람이를 본 날이야. 기억을 잃어가는 몹쓸 병 때문에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네 딸 아람이.”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아프고 그리운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에서부터 드라마를 본 분이라도 권도훈이 이렇게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먹먹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게다. 그것은 우리가 늘 가까이 있어 소중함을 잊곤 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그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고맙게 여기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서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쁘고 보고 싶었던 네 딸 아람이. 아람아 안녕하고 아람이하고 인사를 했어. 처음으로. 눈은 너를 똑 닮았고 입술하고 이마는 네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수진이를 닮았어. 손은 딱 요만했는데 너무 작고 예뻐서 만지기가 두려웠어. 오늘은 기적 같은 날이야. 진짜 천사를 만났거든. 매일 매일 기억을 잃어가겠지만 제발 절대 오늘은 잊지 마라.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쁘게 아람이를 키워준 수진이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하고...”



이 장면에서 감우성은 역시 멜로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허명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다소 담담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서 담담하게 진술을 기록하던 감우성은 아람이와 수진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는 대목에서 결국 무너지고 만다. 꾹꾹 눌러두었다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결국 드러내는 것. 시청자들을 무장해제 시킬 수밖에 없는 연기다.

어찌 보면 뻔한 설정의 드라마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게다. 그 많은 멜로드라마에서 지금껏 무수히 다뤄졌던 것이 불치병 소재가 아닌가. 하지만 불치병 중에서도 알츠하이머라는 새로운 병은 ‘기억’의 문제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새로운 양상을 그려낸다. 그리고 결국 드라마가 담으려는 건 병 자체가 아니라 그런 병을 앓고 있는 한 남자가 남을 이들을 사랑하는 법에 대한 것이다.



어째서 이런 드라마의 시작을 ‘코 분장’ 같은 시트콤적인 상황으로 하려 했을까. 그게 아니어도 충분히 시청자들의 가슴을 잡아끄는 드라마인데 말이다. 게다가 감우성의 연기는 어찌 보면 평범해 보이는 설정조차 더 깊이 있게 몰입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만일 이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초반은 건너뛰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부터가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니.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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