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막장 퇴행 코드 활용하는 KBS 주말드라마, 괜찮을까

[엔터미디어=정덕현] 안하무인에 제왕처럼 지시하고 명령하는 재벌 회장 한종수(동방우). 그 회장의 젊은 아내 나혜미(강성연)와 그 사이에서 낳은 아이 태호(이로운).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라고 보기에는 그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 낯설다. 하지만 그 자리는 한종수 회장의 전처가 낳은 아들 한태주(홍종현)와 예비신부 강미리(김소연)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다. 사실 한태주 또한 한종수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손주에 가까워 보이는 나이 차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한태주를 아들처럼 키운 전인숙(최명길)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전인숙이 버린 딸이 바로 한태주의 신부가 될 강미리다. 전인숙과 강미리는 이미 두 사람이 모녀관계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 집안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호시탐탐 그 관계를 의심하며 전인숙을 몰아세우는 한회장의 젊은 아내 나혜미는 언제 이 사실을 찾아내 터트릴지 알 수 없는 폭탄이다. 친 아들처럼 키운 한태주와 친 딸인 강미리를 결혼시켰다는 사실은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까.

현재 방영되고 있는 KBS 주말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이 보여주는 이 저녁 식사 자리의 한 장면은 지금 KBS 주말드라마의 퇴행적인 현주소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KBS 주말드라마에 늘 등장하는 엇나간 재벌가의 풍경이 있고,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처럼 다뤄지는 ‘결혼’이라는 지상목표가 있다. 무엇보다 ‘출생의 비밀’은 가장 강력한 자극제이자 조미료다. 그래서 이 장면 하나만 봐도 향후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우리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숨겨진 ‘출생의 비밀’을 안고 하게 되는 결혼이란 결국 그 비밀이 드러나면서 폭풍을 몰고 올 것이다.



물론 시작은 뭔가 다른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이라는 제목처럼 모녀 간의 애틋한 관계가 전면에 내세워질 것처럼 보였고, 워킹우먼의 일과 육아를 두고 벌어지는 집안 내 소소한 갈등들이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 강미리라는 능력 있는 인물이 직장 내에서 보여주는 여성상도 어딘가 기대를 하게 만든 면이 있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드라마는 늘 반복되던 주말드라마 공식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결국 하고팠던 이야기는 딸 버리고 간 비정한 엄마 전인숙을 통해 만들어지는 갈등 상황들이다. 갑자기 나타난 전인숙 때문에 진짜 딸처럼 금이야 옥이야 키워준 엄마 박선자(김해숙)는 미칠 지경이 되어버리고, 강미리는 전인숙에 대한 애증에 좋아하게 되어버린 한태주 사이에서 전형적인 주말드라마 여주인공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저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어딨어’ 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은 영리하게도 코미디 설정으로 슬쩍슬쩍 뭉개며 전개하는 이 주말드라마는 그러나 그저 웃어넘기기에는 문제가 많은 시대착오적 설정들을 당연한 듯 지금의 시청자들에게 설파한다. 이를 테면 그토록 힘겨운 육아와 가사일 들 같은 것들을 두고 여성들이 갈등하고 부딪치지만 이상하게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거기에 조언이랍시고 말만 덧붙일 뿐, 정작 그 일들을 도와주지는 않는다.



이런 설정 또한 전형적인 퇴행적인 관계를 재연하는 일이다. ‘여성의 적은 여성’으로 항상 그려지고, 문제 유발자는 늘 여성이며 이 문제들이 발생할 때 마치 조언자나 되는 것처럼 해결책을 떠들어내는 인물은 남성이다. 그런데 그 남성은 말만 할 뿐, 실제로는 제 손으로 밥 한 끼 해먹지도 못하는 그런 인물이다. 이건 비뚤어진 남녀 성 역할 구분을 부지불식간에 당연한 듯 전하는 것이면서, 심지어 그런 남성상 또한 당연하다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퇴행적인 사고관을 갖고 있다는 걸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건 여기 등장하는 세 엄마를 이 드라마가 다루는 방식이다. 박선자는 마치 모성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것처럼 모든 걸 희생하며 자식에게 집착하는 그런 엄마를 담고 있고, 전인숙은 그 정반대로서 ‘자식 버린 엄마’라는 프레임을 씌워 ‘모성 없는 극단적 악녀’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한편 박선자의 첫째 딸 미선(유선)의 시어머니인 하미옥(박정수)은 자신의 삶을 즐기려는 엄마지만 자식의 육아를 돕지 않고, 육아비를 요구한다는 걸 들어 비난받는다.

엄마들은 하나같이 괴로워하고 서로를 비난하고 힘겨워한다. 그래서 박선자와 전인숙은 이제 만나면 머리채를 잡고 “네가 인간이야”고 하는 일이 매 회 등장한다. 또 며느리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좋은 시아버지인 양 행동하는 정대철(주현)은 하미옥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매번 지적한다. 결국은 엄마들끼리 이 모든 상황들 속에서 싸우고 갈등한다. 정작 이 문제를 만들어낸 가부장적 남자들의 세계는 저 뒤편으로 고고한 척 물러나 있다. 드라마는 그래서 은근히 이런 문제의 본질이 가부장적 세계에 있다는 걸 은폐한다. 대신 나쁜 엄마를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로 내세워 욕하고 지탄한다.



KBS 주말드라마는 사실 우리네 가족드라마의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다. 사실상 가족주의 체계가 1인 가구의 급증으로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르신들에게는 사라져버린 가족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잘못된 과거의 가족 체계들과 지금의 달라진 현실을 무시하고 과거의 공식들을 가져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극을 더해 시청률을 가져가는 일은 이 KBS 주말드라마의 상징성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안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드라마의 문제만이 아니다. 전작이었던 <하나뿐인 내편>에서도 빠지지 않았던 게 결국 ‘출생의 비밀’이고, 신데렐라 설정이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런 설정이 그려낸 건 ‘현대판 심청’에 가까운 퇴행적인 여성상의 합리화였다. 아버지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딸의 이야기는 옛 아버지들의 판타지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아버지들의 판타지는 아닐 게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딸을 원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KBS 주말드라마는 해체되어가고 있는 가족의 시대에 남은 거의 유일한 가족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퇴행의 반복은 KBS 주말드라마의 존재 자체가 해악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적어도 지금의 달라진 가족 체계 안에서 생겨날 수 있는 새로운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내려는 노력 정도는 보여야 할 게 아닌가. 그것이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