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령, 거대담론을 두른 그 유령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대형 버스가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탑승객 대부분이 사망했다. 조사 결과 여러 가지 원인이 나왔다. 버스회사는 안전 점검에 소홀했다. 브레이크가 제동력이 떨어진 지 오래였지만 교체하지 않았다. 또 한참 전에 은퇴했어야 할 운전사를 고용했다.

운전사는 자신의 운전 실력을 과신했다. 제한속도를 넘었다. 굽은 길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다 급커브에서 버스가 살짝 차로를 벗어났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듣지 않았다. 버스는 가드레일을 부수고 떨어졌다.

원인에도 원인이 있는 법이다. 버스회사는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하지 않았다. 안전 규정을 어긴 것이었다. 교통안전 당국은 그러나 버스회사의 규정 위반을 눈감아줬다.

부동산 버블 붕괴에 따른 세계경제 위기에도 많은 원인이 작용했다. <뉴요커> 기자인 저자는 본문 440쪽 중 약 3분의 1을 이번 경제위기의 원인 분석과 대응에 할애했다. 이미 나온 사실을 재구성한 내용이다. 새롭지는 않지만 복습할 가치는 있다. 책의 3분의 2에서는 기존 경제학을 비판했다. 본론과 따로 노는 부분이다.

우선 미국 경제의 운전대를 잡고 있던 앨런 그린스펀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한참 전에 은퇴했어야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닷컴 버블을 방관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금리를 과감히 떨어뜨리며 만회하는 듯 했지만, 지나치게 오랫동안 저금리를 유지했다. 이번에는 부동산에서 버블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산 버블을 제어하는 ‘브레이크’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금리 인상으로, 경제 전체에 부담을 준다. 다른 하나는 자산 취득을 위한 대출을 규제하는 조치로, 해당 자산시장에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이 그린스펀은 금리를 올리기는커녕 낮게 가져갔다. 게다가 미국 금융당국은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규제를 풀어놓았다. 기존 규제가 위반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미국 경제는 브레이크를 달지 않은 채 과속 주행했다.

파생금융상품이 거품을 더 키웠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이 증가하면서 채권자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CDO(부채담보부증권)라는 파생금융상품이 고안됐는데, CDO가 잘 팔리면서 다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확대를 부채질했다.

집값이 떨어지면서 악순환이 시작됐다. CDO를 통해 확산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이 부실해지며 여러 금융회사에 충격을 줬다. 2008년에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며 경제위기의 뇌관을 터뜨렸다.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면 처방도 제대로 내릴 수 있다. 저자가 잘 지적했듯 미국 부동산 버블은 통화정책 수장이 적절한 판단을 내려 실행에 옮기고, 금융당국은 시장 참여자가 기존 규제를 준수하도록 했다면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었다. 시장에 추가로 안전장치를 장착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수긍할 수 있다.

저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논리적 비약을 감행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 “시스템이 기본적인 펀더멘털에서부터 실패했다”며 “새로운 게임의 규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적 인센티브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시장이 만능이라는 유토피아 경제학의 대척점에 현실 기반적인 경제학을 놓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대형 사고가 났으니 자동차와 도로를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격이다.

출판사는 한술 더 뜬다. “경쟁이 모든 걸 해결한다는 시장 지상주의는 끝났다”며 “미래의 경제는 독식이 아닌 공존을, 경쟁이 아닌 협력을 담는다”는 말을 표지에 덧붙였다.

<시장의 배반>
저자 존 캐서디
출판사 민음사
값 2만5000원


칼럼니스트 백우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전문기자,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cobalt@joongang.co.kr


[사진=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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