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 한국영화의 고질병을 피한 영리한 상업영화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구구절절’은 한국영화를 오랜 기간 지배해 온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질병의 정도는 가벼운 증상부터 중증까지 다양하다. 이 ‘구구절절’의 대표적 증상은 1970~80년대 방화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갑자기 여주인공이 비를 흠뻑 맞으면서 신세한탄을 하며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이 ‘구구절절’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왔다. 남자주인공이 폼을 잡건, 여자주인공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건 모두들 한번 정도는 자기 신세한탄을 길게 늘어놓는다. 최근에 ‘구구절절’은 주인공의 뜬금없는 설교나 교훈을 늘어놓는 장면으로 변이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신나게 달리는 상업영화에서도 이 ‘구구절절’을 한두 장면에서 앓고 지나가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영화의 정점에서 ‘구구절절’ 고질병이 도지면 관객은 기운이 빠지고 한숨이 나오기 일쑤다. 특이하게도 올여름 극장가의 선두주자인 <엑시트>에는 이러한 ‘구구절절’이 없다. 그리고 필자가 쓰는 이 칼럼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지만 ‘구구절절’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고, 또 어마어마한 반전은 아니니 감안해서 읽어주기 바란다.



<엑시트>는 산악동아리 출신 에이스 용남(조정석)과 역시 산악동아리 출신이자 ‘구름정원’ 연회장에서 일하는 의주(윤아)가 주인공이다. 용남의 가족은 ‘구름정원’에서 어머니의 칠순잔치를 열던 중 유독가스가 퍼진 도시 한복판에 갇히게 된다. 그 후 용남의 가족이 먼저 구조헬기를 타고 떠난다. 영화는 이후 용남과 의주가 고층빌딩들을 옮겨가며 유독가스 안개에 휩싸인 도시를 탈출하는 활극을 그려낸다.

<엑시트>는 속도감 있는 전개 때문에 관객들의 눈을 계속해서 잡아끈다. 다행히 용남과 의주가 위기 상황에 놓일 때도 한국영화의 고질병 ‘구구절절’은 발병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용남과 의주의 서사를 단순히 위기탈출 넘버원의 슈퍼히어로처럼 그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용남과 의주에게는 사연이 많다. 용남은 대학 산악부 에이스였지만 지금은 취업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신세다. 의주 역시 가뜩이나 직장생활이 고된데 직장상사의 불쾌한 접근 때문에 치미는 짜증을 꼴깍꼴깍 삼키며 산다.



<엑시트>는 한국사회에서 이들이 처한 억울함을 센스 있게 한 장면의 짧은 대사로 치고 넘어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용남이 높은 빌딩에 구조헬기가 먼저 도착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는 저기보다 낮은 빌딩에 있는 회사에는 원서도 넣지 않겠다고 말하는 코믹한 장면 같은 것들이다. 그 장면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중소기업을 기피하고 대기업에 지원하거나 공무원에 매달리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보여준다. 철밥통 혹은 밥통에 밥이라도 많이 주는 회사가 어쨌든 위기에서 쉽게 나를 구해주는 것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엑시트>의 센스는 사실 이런 한 장면만이 아니라 주인공의 설정과 그들을 둘러싼 배경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엑시트>는 과거 한국영화에서 구구절절 설명했던 인물들의 개인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말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용남과 의주를 보며 주인공들의 현실에 대해 감각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바로 설명 아닌 상징을 통해 젊은 세대 주인공 처한 사회에서의 박탈감을 계속해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엑시트>의 상징은 어려운 것도 아니라서 영화평론가가 따로 해석해 줄 필요도 없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저어 오오’ 정도의 비유법만 이해하는 일반이라면 누구나 이해가 가능한 상징들이다.



우선 두 주인공이 산악부 출신이라는 점부터 예사롭지 않다. 산악부 출신인 두 주인공은 재난 이후 고층빌딩을 위험하게 오르거나 그 사이를 뛰어넘으며 힘겨운 전진을 계속한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청춘세대의 현실적 상징이다. 더구나 밑에서는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안개가 밀려오고, 이들이 달려가는 곳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이 방화복 대신 입고 있는 것은 비닐로 만든 종량제쓰레기봉투 옷이다. 그리고 그 옷은 지금의 젊은 세대가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통한다. 빌딩에서 신혼가구들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결혼조차 쉽사리 할 수 없는 세대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또 용남 모친의 칠순잔치가 열리는 연회장 ‘구름정원’도 마찬가지다. 칠순잔치가 열리는 이 구름정원은 기성세대가 누려온 허례허식의 공간인 동시에 금방 사라질 공간이라는 상징이 강하다.

이처럼 <엑시트>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징으로 주인공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관객에게 이들의 삶에 대해 쉽게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러면서도 <엑시트>는 쉬운 상징이 아닌 아이러니한 장면으로 이 영화의 의미를 각인시킨다. 용남과 의주는 가까이 다가오는 구조헬기와 길 건너 건물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학원건물의 청소년들을 동시에 발견한다. 용남과 의주는 구조헬기에 신호를 보내다가 건너편 아이들을 구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이때 용남과 의주의 얼굴에는 단호한 정의감 같은 것은 없다. 용남과 의주는 정의가 무엇인지도 알고, 어떤 것이 윤리적인 것인지도 안다. 또한 그들이 처한 세상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지금 당장 위기에 처한 어딘가를 가리킨다. 그 눈물에는 쉬운 상징으로 해석할 수 없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해해야 할 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다.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영화 <엑시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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