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를 품은 달’ 보경, 태생적으로 기구한 캐릭터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드라마에는 태생적으로 기구한 캐릭터들이 있다. 엄청난 비극에 휘말릴 운명이라서 딱하다는 게 아니라 애당초 시청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정해진 채 출발하는 캐릭터들, 이를테면 MBC <해를 품은 달>의 윤보경(김민서, 아역 김소현) 같은 인물이 딱하다는 거다. 보경은 첫 회, 첫 등장부터 내 미움을 샀다. 저잣거리에서 부딪힌 허연우(김유정)의 몸종 설이(서지희)를 까닭 없이 모함하는 순간, 그 어린 것의 얼굴에 선과 악이 교차하는 순간 이미 내 속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으니까.

본래 힘 있고 돈 좀 있다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 업신여기는 꼬라지를 보면 울화가 치미는 성미인지라 허구인지 빤히 알면서도 매번 씩씩거리게 된다. 장차 무엇이 되려고 어릴 적부터 저 모양이냐며 가재미눈을 뜨다 보니 이거야 원, 길에서 악역 연기자를 만나면 등짝부터 후려친다는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지 뭔가.

보경이 뿐만이 아니다. SBS <샐러리맨 초한지>의 백여치(정려원)도 밉상이긴 마찬가지다. 어찌나 안하무인인지 드라마 역사상 가장 버르장머리 없는 캐릭터지 싶다. 제 피붙이들에게야 말을 올리든 말든 알 바 아니나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할아버지(이덕화)네 회사 직원 전체를 몸종 부리듯 부리니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다. 이 또한 아무리 드라마라 해도 너무한다며 눈을 흘겼는데, 그러나 알고 보니 구구절절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인물이라고 한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으며 부모의 죽음이 외가와 연관이 있는지라 복수심에 마냥 엇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연민으로 보듬기엔 그녀의 행보가 과하다는 생각이다. 조실부모했다 해도 누군가가 맡아 사랑을 주며 잘 가르쳐 길렀다면 그렇게 오만방자할 수는 없지 않겠나.

여치의 진상 짓이 뼈아픈 원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해를 품은 달>의 보경이는 태어날 때부터 못됐을까? 그럴 리가 있나. 아이 둘을 키워본 내 경험에 의하면 나를 닮았든, 아니면 내게 배웠든, 아이의 잘못은 모두 부모에게서 기인한다.

보경이가 부친인 이조판서 윤대형(김응수)으로부터 ‘왜 공주(진지희) 아기씨의 마음 하나 잡지 못한 것이냐’는 나무람을 듣는 장면 하나만 봐도 알만 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어린 마음에 공주의 편애로 인해 애면글면 중일진대 궐 안이 모두 연우의 편이라며 하소연을 해봤자 아비의 답은 한결 같을 게 분명하다. 설령 적이라 해도 입안의 혀처럼 굴어 궐 안의 모든 사람을 네 편으로 만들라는 것, 절대 속마음을 들켜서도 내보여서도 안 된다는 것. 그러하니 이 아이, 어찌 딱하다 아니 할 수 있겠나. 권력을 탐하는 아버지의 도구로 길러졌고 이미 꼭두각시 노릇이 시작 됐으니 말이다.










게다가 세자 훤(여진구)이 오매불망 연우뿐인지라 착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상황일 것 같다. 허나 딱하기로 치자면 어디 금상(안내상)의 서장자 양명(이민호)만이야 할까. 아무리 잘나도 그림자처럼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처지인데다 부친에게까지 냉대를 받고 있지 않나. 자신의 이복동생 의성군처럼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부친의 깊은 속내를 짐작 못할 리는 없으나 그래도 살아오는 동안 가슴에 사무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왕의 자리가 있고 신하의 자리가 있다며 명확히 선을 긋는 부친이 원망스러울 만도 한데, 그리고 모두가 세자의 사람이 되어도 허연우만큼은 내 사람이 되어주길 바랬던 그 간절한 마음을 포기해야 함이 한스러울 만도 한데 왕실의 안녕을 위해 선선히 돌아설 줄 아는 양명이 아닌가.

그런가하면 이미 세자빈 자리가 내정된 마당에 혹여 간택단자를 올렸다가 삼간택에라도 들어 비운을 맞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연우네 가족을 보고 있자니 새삼 보경이가 안쓰러웠다. 칭병이라도 하여 간택을 피하라 권하는 연우의 오라비 허염(임시완)과 간택에서 빼달라고 주상께 주청을 올리라는 연우의 어머니(양미경)와는 달리 보경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딸자식을 이용할 생각 밖에 하지 않는다.

세자 훤의 마음이 연우에게 있음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딸이 정쟁의 희생양이 되든 말든 아랑곳 않는 윤대형, 그가 과연 부모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연우가 바르게 잘 자란 것이 다 심지 곧은 부모덕이요, 양명군이 과히 그릇된 길을 걷지 아니 하는 것이 다 부친의 깊은 속 정 덕이라면, 보경이 날로 비뚤어져가는 건 모두가 제 아비 탓이다. 자식을 낳아 길러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entermedia.co.kr
그림 정덕주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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