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 가득한 드라마들 속 ‘인간실격’의 가치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우리 아버지요? 아버지 마음속엔 모든 게 다 있어요. 법도 철학도 문학도 다 아버지 마음속에 있어요. 누가 가르쳐준 것도 배운 적도 없는 데 차곡차곡 쌓여 있어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시집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아버지한테는, 아버지 마음속에는 말보다 생각이 훨씬 많거든요. 오랫동안 생각한 수많은 생각 중에 고르고 고른 몇 개만 말이 돼서 나와요.”

부정(전도연)은 강재(류준열)에게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대학원 졸업하고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아버지에게 말했을 때, 아버지는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부정아 괜찮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오피스텔을 무리해서 샀을 때도 한 시간 넘게 그 집을 보시다가 또 아무렇지도 않게 “예쁘다”고 그러셨다고 했다. 부정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괜찮다”는 걱정이고 “예쁘다”는 근심이라는 것.

JTBC 토일드라마 <인간실격>이 종영했다. 마지막 회 시청률은 2.4%(닐슨 코리아). 1%대를 전전하던 시청률에서 두 배 가까이 반등한 수치지만, 아쉬운 성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시청률이 낮았던 건 완성도가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이다냐 고구마냐로 양분하며 즉답을 요구하는 최근 드라마들 속에서, 삶이 그렇게 간단히 나뉘지 않는다는 걸 진지한 시선으로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인간실격>은 함부로 이야기를 내놓기보다는, 조심스럽게 고르고 골라 말을 건네는 드라마였다. 부정의 아버지 창숙(박인환)처럼.

만나서 쉽게 손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하룻밤을 보내고... 심지어 그것이 불륜이라고 해도 쉽게 끄집어내 자극적으로 그려내는 그런 드라마들과 <인간실격>은 달랐다. 부정과 강재(류준열) 그리고 정수(박병은)와 경은(김효진) 또 딱이(유수빈)와 민정(손나은), 순규(조은지)와 우남(양동근) 사이에서 오간 애틋한 감정들은 저 ‘인간의 품격’을 고스란히 다 보여주고 떠난 창숙처럼 조심스러웠다. 그 조심스러움은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을 살아가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부정과 강재, 정수와 경은은 모두 그걸 표상하는 듯한 인물들이었다. 아란(박지영)의 책을 대필한 후 삶을 부정당한 부정이나, 역할 대행을 하며 살면서 자신의 존재가 지워져가던 강재, 갑질하는 고객 앞에서 애써 미소 지으며 살아가는 정수나,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살아가는 남편 병수발에 존재가 묶여버린 경은 모두가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꾹꾹 눌러가며 버텨온 이들 역시 감정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래서 부정과 정수는 법적인 부부로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갑자기 각각 그들 삶 속으로 들어온 강재와 경은으로 인해 흔들린다. 즉 이들이 각각 갖게 되는 관계는 ‘불륜’이지만, 드라마는 그것을 함부로 불륜이라 표현하지도 또 그렇게 그려내지도 않는다.

대신 부정과 강재는 함께 낯선 곳에서 만나 산을 오르고 전망대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들을 바라보고, 정수는 경은과 모텔에 들어가지만 잠 못 드는 경은에게 어깨 정도를 내줄 뿐이다. 이들의 탈선은 그래서 불륜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다만 지친 서로의 영혼들이 잠시 기댈 곳으로 찾고 내주는 것처럼 보일 뿐.

인간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인간실격>의 시선은 이토록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바로 이 점은 <인간실격>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위로를 느끼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을 함부로 마구 대하는 드라마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함. 그 온기가 이 작품을 쓴 김지혜 작가와 이를 담아낸 허진호 감독의 대사와 영상에서 우리는 느꼈던 것이다.

“나 당신 사랑해. 당신한테는 다 줄 수 있어. 내 눈도 줄 수 있고 심장도 줄 수 있어. 다 줄 수 있어.” 정수는 자신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고백하는 아내 부정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렇게 말한다. 그건 부정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진심이다. 그 역시 경은을 마음에 담고 있지만 아내인 부정에 대한 ‘인간적인 헌신’을 다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타인으로 만나 부부가 된 이들이 해야 할 마땅한 삶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건 부정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한 사람에 대한 헌신이 사랑과는 다를 수 있다는 걸 그는 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나도 그래. 우린 서로 희생할 수 있지만 좋아할 순 없는 거야 이제.” 부정도 정수도 인간으로서의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살아왔고 살아가지만, 그것이 반드시 행복일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창숙의 죽음과 함께 <인간실격>이 종영을 하는 건 우연이 아닌 일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이 드라마가 창숙이라는 위대한 인간을 들여다보려 했던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창숙의 죽음을 겪으며 부정은 알게 된다. “아버지 나는 이제 죽음이 뭔지 산다는 건 또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결국 죽는 일도 사는 일의 일부라는 걸 그 땐 왜 알지 못했을까요?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하루도 산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남은 날을 살아가야 좋을지 알 순 없지만, 아버지. 나는 이제야 아버지가 제게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내내 눈으로 몸으로 삶으로 얘기해왔었다는 걸 아주 조금씩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어요. 사랑하는 아버지. 부디 편히 쉬세요.”

폐지 줍는 일을 노구에도 멈추지 않고 하며 “세상 쉬운 일이 있냐?”고 되묻는 창숙의 목소리가 폐부 깊숙이 아릿하게 느껴진다. 무엇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세상 앞에서 그는 몸소 하루하루를 살아냈던 것이었다. 그 많은 아픔들이나 슬픔들을 가슴 깊숙이 느끼며 혹여나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꾹꾹 말을 삼키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시집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실격>은 그렇게 드러나지 않은 저마다의 시집 하나씩이 된 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던지는 드라마였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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