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모’의 남장여자 멜로, 설레지만 한 꺼풀 벗기고 나면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드라마에서 남장여자 콘셉트는 이제 흔해졌다. 과거 MBC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최한결(공유)이 남장여자 고은찬(윤은혜)에게 “너 좋아해 네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이제 상관 안해. 정리하는 거 힘들어서 못해먹겠으니까. 가보자 갈 때까지. 가보자.”라고 말하며 키스 했을 때, 당시에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정도다.

보수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KBS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그랬지만 SBS <바람의 화원>에서도 또 KBS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도 남장여자 콘셉트를 동원한 퀴어 코드들이 등장한 바 있다. 그래서 KBS 월화드라마 <연모>에서 쌍둥이로 태어나 여아라는 이유로 버려졌다가, 세손인 오빠의 죽음으로 대신 남장을 한 채 세자 역할을 하게 된 이휘(박은빈)의 남장여자 설정도 이제는 좀 뻔하게 느껴질 정도가 됐다.

<연모>가 가진 남장여자 콘셉트가 들어간 세자와의 멜로라는 점은 여러 모로 <구르미 그린 달빛>을 연상케 한다. 역사보다 멜로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 특히 그렇다. 다만 다른 건, 그 남장여자가 내시였던 <구르미 그린 달빛>과 달리 <연모>에서는 세자라는 점이다. 남녀 구도만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조선시대라는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 구도 변화는 상당히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어떤 면에서는 좀 더 파격적인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서의 권력구도와 남녀 사이의 성차별을 염두에 두고 보면, 남성인 세자가 남장여자라도 내시와 사랑에 빠지는(그 자체로는 남색일 수밖에 없는) 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담보한다. 하지만 <연모>의 이야기는 세자가 남장여자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는 정지운(로운)이라는 일개 사서가 세자인 이휘에게 점점 마음이 흔들리고 그래서 보호하려 하다가 결국 볼에 뽀뽀까지 하는 장면은 저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 파격을 담고 있다.

물론 조선시대라도 여성이 먼저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는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그 사회에서 남성들이 먼저 구애를 하는 게 일반적이고, 그것도 궁중의 세자 같은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런 일반적 상황이라면 <연모>에서의 멜로는 정지운이 아닌 이휘가 보다 적극적이어야 하는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남장여자 콘셉트를 가져온 이 사극은 진짜 남성인 정지운이 먼저 남장여자 이휘에게 다가가는 이상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김상궁(백현주)의 머리를 자른 일로 분노한 이휘가 태감(박기웅)에게 주먹질을 한 일로 혜종(이필모)에게 꾸지람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자, 정지운이 “잘 하셨다”며 세자 이휘를 안아주고 토닥이는 장면이나, 정지운이 상처에 약을 발라줄 때 한껏 수줍은 표정을 짓는 이휘의 모습이 그렇다. 물론 시청자들은 이휘가 남자여자라는 사실을 알지만, 극중에서 정지운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남성인 세자에게 자신이 하는 행동들은 멜로 관계에서도 또 세자와 신하 관계에서도 상식적이지는 않다.

이 같은 개연성 부족은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허면 왜 연회 때 제게 그리 차갑게 대하는 겁니까?”라고 묻는 정지운의 질문은 남장여자인 걸 그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들어보면 너무 연인 간의 대화처럼 들린다. 물론 과거에는 임금님을 ‘님’이라 부르며 연모하는 신하들의 관계가 마치 멜로 관계처럼 절절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런 장면은 이 사극이 마치 남장여자라는 가면을 쓰고 하는 일종의 놀이 같은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놀이 같은 느낌은 사극, 그것도 KBS 사극에서 남장여자 코드를 담은 멜로가 허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상황(개연성이 없는)이기 때문에 오히려 허용된다. 보다 진지하게 다뤄진다면 그 퀴어적 멜로 관계는 놀이가 아닌, 진짜 퀴어 드라마가 되기 때문이다.

남장여자라는 설정 자체가 말해주듯이 아직까지 한국 드라마에서 대놓고 퀴어 코드를 쓰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남장여자 코드가 활용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남장여자 설정을 쓰면서도, 좀 더 성별의 차원을 뛰어넘는(그래서 진짜 퀴어 코드가 들어간) 그런 파격적인 멜로는 아직 요원한 것일까.

퀴어적 멜로 관계라고 해도 굳이 서로를 안거나 볼 뽀뽀를 하고 나아가 키스를 하는 그런 장면들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스킨십이 없어서 더 절절한 멜로 관계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연모>에서도 이휘와 정지운의 퀴어적 멜로를 스킨십과 상관없이 절절하게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그건 어려서 두 사람이 만났던 폐장각이 그곳이다.

궐 밖의 한 사내를 사랑한 궁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해 그 아픔으로 목매달아 죽은 그 곳을 역대 왕들이 없애려 했지만 저주라도 붙은 듯 모두 병이 걸리거나 죽어나갔다고 어린 시절 궁녀였던 이휘는 정지운과 그곳에 대해 말해준 바 있다. 없애지고 못하고 문을 닫아 버린 그곳은 이휘와 정지운의 사랑을 표상하는 공간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폐가가 되어 쓸쓸한 그 공간에 꽃을 심어 놓은 정지운과 그걸 보고 설레는 이휘의 상황이 그러하다.

<연모>는 말이 안 되는 상황들과 개연성 부족도 드러내고 있지만 이상하게 설레게 만드는 드라마인 건 사실이다. 그건 아마도 위계와 성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일 게다. 하지만 남는 아쉬움도 있다. 적당한 남장여자 콘셉트를 가져와 누가 봐도 익숙한 이성애 코드로 그려나가기보다, 좀 더 과감한 퀴어 코드를 전면으로 끌고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물론 이 또한 호불호가 나뉠 수밖에 없는 선택일 테지만 지금의 시청자들은 훨씬 열려 있지 않을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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