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도전적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바야흐로 2016년, 그러니까 관찰예능이 지금처럼 일상이 되기 이전 tvN에서 <바벨250>이란 실험적인 예능을 내놓은 적이 있다. 연예인 출연자는 배우 이기우 단 한 명, 그 외에는 중국, 태국, 러시아, 프랑스, 브라질, 베네수엘라 출신 일반인 출연자 6명이 남해의 한 폐교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을 담은 리얼버라이어티쇼였다. 러시아의 안젤리나 다닐로바를 제외하면 한국 생활에 익숙하거나 인지도 있는 인물조차 없었다.

시청률과 화제성은 낮았으나 이 기획은 당시 개인적으로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국적 인원들이 모여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담은 대안 커뮤니티 건설한다는 설정이 꾀나 히피스럽기도 했고, 당시 여신으로 떠올랐던 다닐로바는 너무나 예뻤다. 문화 다양성에 관한 콘텐트지만 요즘 여행예능처럼 유창한 영어로 원활히 소통하며 문화적 거리를 허무는 코드와는 달랐다. 다양한 문화와 개개인의 가치관이 반영된 리더십 유형을 탐구하고, 마치 에스페란토를 만들 듯 일부러 각자의 모국어만을 사용하면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용어를 만들어가자는 기획은 전위적이고 여러모로 전무후무한 사회적 실험을 펼쳤던 예능이었다.

그리고 8년 후, 그때와 비슷한 충격의 예능이 나왔다. 웨이브의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초반 회차를 보고 쓴 칼럼에서는 마케팅을 아쉬워했다. 기존 두뇌, 추리 서바이벌 예능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흥미로운 예능인데, ‘사상검증’이란 어그로가 미끼로 통하지 않고, 피로도 탓인지 오히려 외면당하는 요소로 작동했다. 여전히 제목부터 그냥 ‘커뮤니티’로 가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현피’ 버전과 같은 뉘앙스는 피했어야 했다고 본다. 하지만 마지막 회를 앞두고 있는 지금은 이 쇼가 마케팅의 방향성보다는 서바이벌 예능에 새로운 길과 가능성을 열어준 굉장히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실험임을 짚어야 마땅하다.

서바이벌 예능은 OTT시대에 들어서면서 큰 각광을 받고 있지만, 거품이 낀 장르라고 생각한다. 스케일업, 시즌제에 용이하고 문화적 맥락이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기존 서바이벌 예능이 대형화됨에도 여전히 마니아들만 양산하는 마이너 장르에 머무는 이유는 왜 봐야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여전히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두뇌형 서바이벌 예능은 롤플레잉 게임, 방탈출 게임 같은 코드를 좋아하고 그 세계관에 거부감이 없는 시청자들의 적극적인 관용 하에 몰입의 단초가 생기는 장르다. 다시 말해 시청자들이 가상의 세계관에 호기심을 가져야만 비로소 인간군상의 민낯 등 준비한 재미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몰입을 높이는 방식이 지금까진 스케일업에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해지고 예산이 늘어나도 현실적 제약이 하나의 장치이기도 한 리얼리티 예능에서 공포 영화 같은 환경과 설정을 요구할 순 없다. <좀비버스>가 좋은 예다.

그런데 <사상검증구역>은 사상 처음으로 관련 장르에서 게임과 생존 키워드가 아니라도 봐야 할 이유가 확실한 쇼다. 특유의 문화적 취향이나 코드가 필요하지 않다. 방탈출 게임 같은 세계관에 익숙하지 않고, 이런 류의 예능을 본 적 없어도 상관없다. 말초적인 생존을 위한 게임이나 스케일을 거대하게 키운 방탈출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쇼는 생존 버라이어티를 통해 사람의 다면성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난민을 상징화한 이주민이란 장치를 만들고는,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공금을 나눠주라는 미션을 던진다. 여기서 가치관 갈등이 발생하고, 당연시 되었던 갖고 있던 생각이 흔들리는 사람도 나타난다. <사상검증구역>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출연자는 물론 시청자 개개인이 갖고 있는 견해에 질문을 던지며 왜 그런 가치관을 갖게 됐는지, 당신이 중시하는 가치는 무엇이고 어디서 기원했는지 자신의 생각을 꺼내놓을 기회의 장이자 다양한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보는 사고의 장을 펼친다.

페미니즘, 이퀄리즘 등등 머리 아프고 복잡한 이야기들, 민감한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짓눌릴 필요가 없다. 서바이벌쇼의 장르적 특성과 게임의 요소를 가지고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를 묻는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션과 게임을 통해 달라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지 반문한다. 즉, 그간 살아온 삶의 경험을 토대로 가진 가치관이란 것이 리셋된 환경에서 게임의 룰을 통해 이른바 당사자가 되었을 때도 유효한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함께할 수 있을지 묻는다. 생존과 탈락을 넘어선 새로운 몰입의 지점이다.

이런 질문들이 다발을 이루며 ‘당신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까?’라는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진다. 세금, 공금 분배, 선의와 시스템 앞에 대면할 상황을 계속 주입하고 점점 바뀌는 사람과 관계를 지켜본다. 아무리 선의라도 시스템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생기는 문제들을 들려주고, 분배와 안전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적 가치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과 갈등을 펼쳐 보여준다. 결국 모두를 위한 선과 인간의 본성을 어쩔 수 없이 위배되는 가치일까. 평화와 서바이벌은 양립할 수 없을까. 연대에 있어 개인의 이익, 희생은 결국 당사자가 되면 달라지는 위선일 뿐일까 등 물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은 고조되는 생존의 긴장감과 보조를 맞춰 과연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공리적인 선택이 가능한 커뮤니티가 존재할 수 있을지 유지될 수 있을지 궁금증을 더욱 키워간다.

거창하게 커뮤니티까지 가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얻는 효용도 만만치 않다. 가만히 있어야 그나마 안전할까? 앞장서서 주장을 많이 하면 정을 맞을까? 등등 개인적인 층위에서 얻어갈 장면들도 관찰할 수 있다. 모의 국민참여재판을 하면서 감성에 호소와 이성적 접근 사이, 자신의 선의가 타인에게 기만이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 뿐 아니라 시선의 압력이 쏟아지는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볼 수도 있다.  

낭자처럼 공동의 선이란 가치 자체에 냉소적인 사람도 있고 고애신과 지니처럼 희생 앞에 주저하는 사람도 있다. 서바이벌 게임의 베테랑인 마이클(그러니까 윤비)는 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비관적이지만 노력은 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와 완벽한 합의에는 회의적이다. 재밌게도 실질적인 양당제인 나라답게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출신 정치인인 슈퍼맨과 백곰이 판을 이끌고 간다. 서울대 로스쿨 출신 변호사인 벤자민은 판을 흔드는 역할을 몸서리칠 만큼 잘 수행하고, 테드는 전체주의적인 방식에 회의를 가지면서도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낸다. 그레이는 킹메이커 김윤환처럼 되고 싶어 한다.

각자의 가치와 생각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니 <피의게임>처럼 성별, 담배 피는 사람, 숙소 등 별 이유 없이 나뉘는 친목에 눈살 찌푸려지지도 않고, <데블스플랜>처럼 수동적으로 살아남는 출연자가 나올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다양한 가치와 견해가 정치적 행위를 통해 세력과 논리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 하나의 국가를 모델링하는 실험을 지켜보게 된다. 선의와 담합과 카오스의 차이는 무엇일까, 계속해 생각할 기회가 이어진다.

다만, 철학수업 같은, <정의란 무엇인가?>의 예능판 같은 <사상검증구역>은 그래서 미션도 다소 복잡하고 생각할 거리는 무척 많다. 즉 어드벤처 생존, 방탈출식 생존, 추리 예능과 같이 마니아들이 좋아했던 서바이벌 예능과는 결이 다르다. 커뮤니티의 담론에도 익숙해야 하며, 자신만의 견해와 가치를 갖고 있으면서,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도전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어야 재미가 더욱 커진다. 시청자들에게 취향이 아닌 교양이 요구되는 꽤나 고급 예능이다.

오늘날 좋은 예능인지 판단하는 기준 중 한 가지가 새로운 흐름의 창출 여부다. 그런 점에서 <사상검증구역>의 훌륭한 점은 기존의 비슷한 장르의 쇼들이 걸어가고 있는 스케일 업과 자극도 높이는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수학적 사고와 논리를 기본으로 하는 추리를 내세운 예능과 물리적 힘을 내세운 서바이벌이 나왔으니 이제 문과 서바이벌이 나올 차례였던 것일까. 벤자민의 말처럼 여가시간에 토론을 즐기는 진지한 ‘대문자 T’들을 위한 예능은 큰 흥분을 만들어낸다. 제작진들도 역시 지독한 토론 동아리 출신들인 걸까. 서울대를 비롯해 명문대 출신 엘리트 출연자들을 흔드는 설계를 통해 서바이벌쇼의 틀 안에서 곱씹어볼만한 유의미한 사회적 실험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웨이브]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