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판석PD “‘아내’ MBC에서도 충분히 가능했다”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1편에서 계속) 과거 인터뷰를 통해서 “대사가 한 줄이거나 심지어 대사조차 없는 단역 배우들의 오디션을 꼼꼼히 본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아내의 자격>을 보면서 그 말을 절감했다. 말 그대로 한번 등장하고 마는 단역들조차 놀랄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 "정말 다 잘했다. 15회에서 조현태(혁권)가 아파트 외벽의 가스배관에 매달려 있을 때 출동했던 구급대원들도 극단 ‘마방진’ 소속의 배우들이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겠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들이 극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그 중 구급차에서 “본처 되시는 분 타세요!”하던 사람은 실제로도 유명한 연극배우다. 명진(최은경)네의 연변 출신 파출부인 길해연 씨도 위대한 연극배우 중 한 분이다. 그런 분들이 줄을 서서 오디션을 보러 온 거다. 그렇게 훌륭한 예술가들은 비록 빛이 안 나는 역할이라도 선의가 있다는 판단, 작품이라는 판단이 있으면 움직인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훌륭한 분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바로 그 조현태가 배관에 매달렸다가 구출되는 장면은, 태오가 서래를 만나러 갔다가 상진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방기구에 의지해 창밖으로 탈출하던 장면과 묘한 대구를 이룬다.

- "의도한 건 아니다. 다만 조현태가 배관을 타는 장면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만화 같은 장면이다. 그럴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빙성 있게 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신빙성을 잃으면 그냥 만화 같아지고 조잡해진다. 그리고 몇 회가 될지는 몰랐지만 ‘조현태는 장차 아파트 배관에 매달린다.’는 사건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거기에 맞춰서 대사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면서 캐릭터를 구축하여 그 신빙성을 만들어 간 거다. 그 장면을 찍을 때도 119 구조대의 활약상을 다룬 교양 프로그램처럼 찍었다. 사실 드라마니까 구조하려는 이의 다급한 표정, 구조당하는 이의 눈 클로즈업 같은 게 들어가도 될 법하다. 하지만 그냥 119에서 평소에 구조하는 모습 그대로 해 달라고 했고 그걸 실시간으로 찍은 거다. 진짜 구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필요했고, 그게 신빙성을 부여하는 거다."

시간상으로는 나중이지만, 조현태의 구조 신을 태오의 탈출 신보다 먼저 구상했던 건가.

- "그렇다. 태오가 소방기구를 타고 탈출하는 장면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처음에는 상진이 찾아와서 발각되면 삼자대면을 시키려고 했다. 정 선생과도 그렇게 이야기했었는데, 대본을 쓰시던 정 선생이 세 명을 모아놓으니 도저히 이야기가 풀리지 않아서 태오가 거기 없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들어보니 맞는 말 같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태오를 빼돌릴까 하다가 정 선생이 소방기구로 탈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그리고 나중에 보니 그 상황을 너무 잘 쓰셨더라. 정 선생에게는 그런 혜안이 있다. 인물이나 사건을 표피적으로만 다루는 걸 거북해하고 몇 발자국 더 나가는 게 있다. 토씨의 선택만 봐도 그런 것이 느껴진다."

13회 초반부에는 태오가 서래에게 함께 살자고 강경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보면서 든 의문은, 왜 이토록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 속도의 삶에 길들여지기 전의 아내 홍지선(이태란)을 설득하지 못했을까라는 것이다.

- "그 세계관도 아내를 통해 성장하면서 얻게 된 깨달음이다. 만약 그에게 지선이라는 아내가 없었다면 태오 또한 영영 깨닫지 못한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태오에게는 운동권 대학생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아니다. 결혼생활을 통해 진화한 태오가 된 것이다. 속도형 인간과 살면 함께 변해갈 수도 있지만, 자기성찰적 인간은 그런 상대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진화시킬 수 있다.

사람은 언제나 주변 환경을 통해 변하거나 성장한다. 그러니까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스승이다. 심지어 바보 같은 사람조차도 다 스승이다. 물론 전제는 자기성찰적 시선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러 그것을 갖춘 사람은 곁에 독사가 있다고 해도 성장할 수 있다."

서래와 태오의 동거가 시작될 때 두 사람이 원칙을 정하면서 가볍게 실랑이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개의 드라마에서 천생연분이 만나면 그것으로 만사형통이지만, 생각의 차이란 현실에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굉장히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 "그 대목을 정 선생이 써서 보내주셨을 때, 나는 바로 그 의미를 알겠더라. 그건 결혼해서 생활해 본 사람이라면 토를 달지 않을 장면이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기 위해서다. 아무리 둘이 사랑해서 동거한다 해도 “너는 나야.”라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악은 말로 다 못한다. 조금만 자신의 뜻과 다른 모습을 보여도 화를 내고 상대를 괴롭히게 된다. 부모들도 자식을 자신과 동일시해버리기 때문에 티끌만한 오류도 못 견디지 않는가. 사실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나인데. 연인 사이라면 “당신은 왜 나를 남이라고 생각해? 그게 슬퍼.”라고 하겠지. 실은 그게 사랑이다."

극 중에서 욕망만을 쫓았던 자들은 ‘슈퍼 갑’인 조현태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강은주(임성민)만은 승자로 남았는데.

- "강은주의 뒷이야기도 원래 대본에 있었다. 먼저 아들인 제훈은 할아버지가 데려다 키운다. 장손이니까 최고의 집사와 상주 가정교사를 통해 성장하게 되는 거다. 그리고 은주는 어쨌든 첩이니까 이 집안의 입장에서는 떼놔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미국으로 보내 미술사 공부를 시킨다. 장차 돌아오면 미술관 하나를 떼 주겠다는 거다. 이 내용이 대본에 있었는데 분량 문제로 덜어냈다.

은주는 제훈을 상속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이 승리는 아니다. 결국 아이와 헤어지니까. 제한된 접견권만 있을 뿐이지. 그러니까 은주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고통을 받게 되는 거다."

그리고 서래의 아들인 결이(임제노)가 나이에 비해 너무 의젓하다. 그리고 그 의젓함이 극 후반부의 판도를 바꾸기도 하는데.

- "결이의 의젓함은 성장배경에서 나온 거다. 한심한 아버지와 맑은 어머니, 그 괴리 속에서 살던 중에 감춰져 있던 주변 상황이 갑자기 확 열렸잖나. 그 과정에서 스스로 깨닫는 게 있다. 게다가 아직 사춘기 전의 나이이기 때문에 맑은 영혼이 빠져나가지도 않은 때다.

그리고 부모들은 아이가 의젓하길 바라지 않는다. 애가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는 짓을 하면 오히려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쁘다. 애를 길러보면 안다. 그러니까 결이가 의젓하면 의젓할수록 서래에게는 형벌인 거다."

사실 결이가 엄마와 살고 싶다고 이야기해서 서래가 아이마저 되찾아 왔다면 상진은 완벽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고 마치 <아줌마>의 결말처럼 풍자적인 색채가 강해졌을 것 같다. 강은주의 몰락을 그대로 보여줬을 경우도 마찬가지. 어쩌면 극의 관조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달까.

- "말대로 극과도 맞지 않다. 사실 대본 단계에서는 상진을 더 망신스럽게 만들 생각도 있었다. 후반부에 서래의 옛 직장상사가 찾아와서 “양육권 소송하면 네가 이겨.”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지 않은가. 거기에 어떤 대사가 더 있었느냐면 “아동심리학적으로도 결이를 그 아버지에게서 떼어놔야 한다.”는 말을 그 선배가 한다. 맞는 얘기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빼버렸다. 만약 그렇게 말을 해버리면 이후로는 서래가 목숨 걸고 아이를 구하려 덤벼들겠지. 그 이야기는 16부가 아니라 50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문사회과학적으로 옳은 이야기는 분명히 있지만 삶의 반영인 드라마는 그것만을 완벽하게 추구할 수 없다. 세상은 회색이 반이다. 나는 과연 예외일까? 나도 부모의 틀 안에 있는데."



서두에 <아내의 자격>만의 독특한 화면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명 연출과 관련된 부분이다. 특히 빛의 양이 지나치게 많은 듯한 대낮 세트 장면들이 독특한 느낌을 선사했는데.

- "영상에서 인물을 예쁘게 보이도록 하는 빛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삼각조명으로 가야 한다. 키 라이트에 보조 라이트, 그리고 백 라이트가 있어야 인물의 윤곽선이 살아난다. 거기에 백그라운드 라이트까지 해서 삼각조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실생활의 빛과는 거리가 멀다. 보조 조명, 백 라이트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아내의 자격>에서 조명 컨셉트는 설혹 빛이 모자라더라도 보조의 광원을 동원하지 말고 현실의 광원만 두자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우중충할 수도 있고 화면이 일그러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가보자고 했다.

그리고 때때로 빛이 너무 많아서 심지어 말려 보이기까지 하는 화면에는 좀 안타까운 이유가 있다. 사실 그 정도까지 갈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실내 세트를 지으면 창문 너머로 바깥 풍경 사진을 배치한다. 현재 드라마 세트에서 그 풍경은 사진을 찍고 확대해서 필름으로 만든 다음 뒤에서 조명을 비추기 때문에 무척 리얼하다. 그런데 세트에 처음 가서 보니, 필름이 아니라 천에다 풍경을 뽑아 놓았더라. 촬영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조잡했다.

물론 <아내의 자격> 제작비가 일반적인 미니시리즈에 비해 적은 편이긴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었다. 도면 상태에서 알아봤어야 했는데, 5년 만에 드라마를 만들다 보니 그걸 놓친 거다. 그러니까 창 밖에서 들어오는 빛의 양이 너무 많은 것은 그런 부분을 가리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조명 효과가 의외의 효과를 낳기도 했다. 특히 강남 아파트 실내가 그렇게 지나치리만치 많은 빛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면, 미래(장소연)가 사는 집의 외관은 밤 장면 외에 등장하지 않으면서 명확하게 대비효과를 이루었으니까.

- "일단 노선이 정해지면 일관되게 가야 한다. 그리고 밤 장면이 아닌데도 미래가 사는 건물이 나온 적이 딱 한번 있다. 서래가 처음 미래의 집을 찾아갈 때다. 강남이라는 땅의 화려한 세계에도 뒷골목이 있다. 그 뒷골목에는 고깃집부터 룸살롱까지 유흥가들이 밀집되어 있다. 그 가게들의 모든 환풍기들이 모여 있는 곳, 미래의 아파트는 거기에 있다. 강남의 모든 폐기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 속에 미래가 산다. 저자거리 속에 부처가 있는 거다. 그래서 그 장소를 보자마자 ‘여기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남대로에서 버스를 내려서 뒷골목으로 걸어가는 서래의 모습을 하나하나 보여주면 이런 사회학적 의미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럴 대목은 아니었기 때문에 고심하다가,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불렀다. 그 퀵서비스를 따라가다 보면 구멍 하나가 나오고, 그 구멍 너머로 아파트에 올라가는 서래의 모습을 잡았다."

<아내의 자격>은 여러 지점에서 <아줌마>와 <하얀 거탑>의 진화상처럼 보인다. <아줌마>는 기본적으로 풍자극이었고 인물들도 그에 따라 전형적이었다. 시청자들은 단지 주인공 오삼숙(원미경)의 시선으로 지식인들을 한껏 비웃으면 되었다. <하얀 거탑>에 이르러서는 악역에 가까운 장준혁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모순을 체험토록 한 바 있다. 우리가 몰입하고 응원하는 이가 악역이라? 그런데 <아내의 자격>에서는 그 게임이 한층 복잡해졌다. 시청자들이 시험에 드는 과정이 너무 많다. 윤서래에 몰입해서 극을 시청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녀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마음을 다 잡지 못하고 늦은 밤에도 태오를 만나러 나가는 장면에서는 고개를 젓게 된다. 한상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끝없는 ‘진상’ 짓을 견디다 보면 마침내 그를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은 역시 구리기 짝이 없는 슈퍼 갑 조현태다. 그 장면이 일순간이나마 통쾌함을 선사한다는 데 함정이 있다.

- "맞다. 모순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자는 거다. <아줌마>의 인물들은 실제로 매우 단순했다. 캐릭터들은 역할극을 수행할 뿐이었다. 그들을 비웃는 통쾌감이 컸기 때문에 정 선생이나 나나 철저히 사회과학적으로만 접근했다. 그 과학 속에서 인물들에게 역할을 맡긴 것이다. 사실 살아 있지 않은 캐릭터들이다.

거기에 비하면 <아내의 자격>은 정말 진화한 거다. 이 드라마의 엔딩에 서래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인생이 이런 건가 보다.(중략) 때로 참혹했지만 나는 어쨌거나 지나왔고….”라고 하는데, 참 잘 쓴 내레이션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정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레이션을 추가하고 싶다고. 뭘 추가했나 했더니 ‘참혹했지만’의 내용을 더 붙인 거다. ‘기괴한 인간이 나를 괴롭히고, 나쁜 상황이 날 괴롭히고…’ 라는 식으로. 그런데 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이 덧붙으면 서래가 모든 잘못을 타자에게만 전가하는 것 같았다. 그녀 자신에게도 오류가 있었고 ‘때론 참혹했지만’의 이유에는 그녀 자신도 포함되는 게 맞다고 정 선생에게 말씀드렸더니 동의하시더라. 윤서래가 어찌 완벽한가? 그녀도 사교육 전쟁에 온몸으로 동참하지 않았나. 그 죄가 작지 않다. 그리고 그 죄는 살면서 받아야지.

그래서 엔딩 신에서도 모처럼 하이킹을 나왔지만 계속 자갈밭이고, 자전거는 오르막길에서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올라가지 않는다. 내려서 끌고 가는 수밖에. 다행히 평지가 나오면 자전거를 탈 수 있겠지만 또 다시 오르막길이 나오면 내려서 끌고 가야겠지. 인생은 아무리 외로워도 그렇게 혼자서 짐 지고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엔딩 신에서도 둘이 아니라 따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얀 거탑> 때만 해도 우용길(김창완) 같은 거악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장준혁의 나쁜 선택들도 희석된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자격>에서는 그런 연막도 사라지면서 시시각각으로 모순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를테면 여기에 등장하는 파출부들을 <아줌마>의 오삼숙 캐릭터의 연장선상에서 윤리적 우위에 둘 수도 있었을 텐데, 카메라는 그들조차 냉정하게 바라본다.

- "홍지선의 집에 드나드는 파출부는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우리 그 년은….”이라고 지선을 부르지 않는가. 그리고 지선이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그 아픔을 보듬지 못하고 일을 시킨 것에 대해 짜증을 부린다."



<아내의 자격>은 최근 몇 년 간 한국의 안방극장에서 만날 수 없었던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이다. 거기서 파생된 반대의 의문. 만약 지상파의 제작환경이었다면 이 드라마가 온전히 같은 모양새로 나올 수 있었을까?

- "나올 수 있다. 드라마를 변질시키려는 의도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실 많지 않다. 연출가 개개인들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다. 다른 방송국은 몰라도 MBC는 연출가에게 맡겨주었다. 기획 단계에서 이런 배우들을 데리고 편성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있을 수 있지만, 일단 통과된 후에는 데스크가 심하게 간섭하지 않는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음악 선택에 있어서는 드라마 연출가들의 재량권이 약화되었지 않은가? 제작사들의 몇 안 되는 수익 구조이기 때문으로 알고 있는데, <아내의 자격>에서는 그 부분에서도 흔치 않게 연출가의 의도가 관철된 것 같다. 음악 사용도 극히 절제되어 있었고, 트렌디한 가창곡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 "사운드트랙 앨범과 벨소리가 주요한 사업 수단이기 때문에 제작사들이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맞다. 그리고 현재의 드라마 제작비 구조에서는 음악 쪽에 돈을 지출하지 않는다. 음악감독을 선임하면 그가 알아서 음반사와 계약하고 그 돈으로 음악을 제작한다. 그렇게 해서 음반사가 미는 가수의 녹음도 따고 여러 사업도 벌이게 되는 거다. 그래야 현재의 시스템에서 음악 제작비가 나온다. 이걸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그래야 좋은 연주가도 쓸 수 있고, 노래 잘 하는 가수도 쓸 수 있으니까. 단점은 드라마 음악 모두가 너무 천편일률적이라는 거다.

요즘의 음악감독들은 스스로 작곡하기보다 다른 작곡가들을 어레인지하는 역할에 더 충실한 편인데 <아내의 자격> 음악감독으로는 직접 작곡할 사람을 구했다(이남연 음악감독). 그리고 가창곡을 만들지 않겠다는 원칙도 세웠다. 그러면 판매용 음반을 만들기도 힘들다. 대신 제작비에서 음악 비용을 지출하자고 했다. 비록 돈이 없으니 체코 오케스트라를 쓰지도 못하고 미디작업을 할지언정 일단 그렇게 시작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노래를 만들 능력이 없어서 팝송을 쓴 것도 아니다. 시청자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네 곡 정도의 인상적인 팝 넘버들이 나왔다. 거기에는 연출가 본인의 선택도 있지 않았나?

- "음악 감독이 찾아온 것이 대부분이다. ‘Turn! Turn! Turn!’은 너무 오래된 노래니까 내가 추천해서 넣은 거지만 엔딩 테마인 ‘Daydream Believer’같은 곡도 모두 음악 감독이 찾아온 건데 다 좋았다. ‘다운 바이 더 샐리 가든(Down By The Sally Garden)’은 민요였고. 여하튼 음악감독이 참 잘했다. 음악 믹싱 작업 때는 어긋날 때가 참 많다. 화면과 전혀 안 어울리면 어떡해? 미칠 것 같은 때도 많은데, 이번에는 어긋나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환경에서 많은 연출가들이 작품을 마친 후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작품에는 만족도가 높을 것 같다.

- "만족도가 높다. 아직까지도 어떤 드라마가 가장 애착이 있느냐는 식의 물음에는 답하기 어렵지만 만듦새는 확실히 하면 할수록 나아지는 것 같다. 예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니까.
특히 이 드라마는 은유 속에 또 은유가 담겨 있는 식이라, 까도 까도 곱씹을 부분이 끝도 없이 나온다. 드라마가 나와 정 선생의 의도를 넘어선 경지까지 가 버린 거다. 왜곡하지 않고 세상을 담으려 했기 때문에 인생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아우를 수 있게 된 것 같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꽉 짜여진 완결성 또한 얻었다.

- "시작만 정해놓고 뒤를 생각하지 않은 채 만들어나갔는데, 잘못하면 중구난방이 될 수 있다. 있던 인물이나 설정이 없어진다든지. 이런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 스스로의 방향성이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인생철학이나 가치관일 수도 있는데, 인물을 움직이다보면 숱한 갈림길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 갈림길에서는 결국 방향성이 선택을 한다. 자기 철학이 확고한 상태에서 그 방향성을 좇으면 묘하게 이야기가 맞아떨어진다. 유리한 길만 좇다 보면 종국에는 다 어긋나버린다. 있던 설정도 없어지고, 없던 설정이 생기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방향성에 충실하면 그냥 뒤꿈치만 쫓아가도 된다는 믿음. 그리고 그것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마치 큐빅 퍼즐처럼."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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