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기의 트렌드] 요즘 드라마를 보면 가족찾기가 한창이다. 뒤바뀐 형제와 부모를 찾는 줄거리가 단골손님이다. 원래 출생의 비밀은 재벌가와 함께 한국 드라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2대 구성요소였다. 하지만 요즘 핏줄 캐기는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친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도 자주 행해진다.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없는 시절 이야기인 ‘짝패’에는 목뒤에 난 점으로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최근 MBC의 거의 모든 드라마들은 핏줄찾기에 목을 매고 있다. ‘짝패’는 양반집 자식이지만 천민으로 자란 천둥(천정명)과 천민의 자식이면서도 양반가에서 자란 귀동(이상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양반집 유모가 자기 자식만은 천민으로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같은 시간에 태어난 주인집 아기와 바꿔치기했기 때문이다.

천둥은 천민 집안에서 자랐지만 글과 셈을 할 줄 알고 귀동은 김진사 집에서 자랐지만 활을 잘 쏘고 동네에서는 알아주는 주먹으로 통한다. 양반 피를 타고났다고 글에 능하고, 천민 혈통이라고 주먹싸움을 잘한다는 설정도 사실은 편견이다. 하여튼 어릴 때 뒤바뀌어 엄청난 상황 변화를 초래할 이 뇌관은 드라마를 끌고가는 큰 힘이 되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도 병원에서 뒤바뀐 두 여자의 가족찾기를 다룬다. 부자부모덕에 상위 10%의 삶을 살아온 여자와 가난한 부모탓에 힘든 삶을 견뎌온 여자의 인생이 통째로 뒤바뀌었다. 김현주는 이 사실을 길러준 아버지(장용)으로부터 듣고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적응에 애를 먹고 있다.



곧 종영하는 ‘욕망의 불꽃’도 재벌가 며느리 윤나영(신은경)이 존재조차 몰랐던 친딸 백인기(서우)가 친자식처럼 길러온 아들 김민재(유승호)와 결혼하려고 하자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게 이야기의 핵심이다.

‘몽땅 내사랑’도 김원장(김갑수)이 평소 구박하는 학원 아트바이트생(윤승아)이 진짜 딸이라는 내용이고, 최근 끝난 ‘마이 프린세스와과 ‘폭풍의 연인’도 핏줄증명하는게 큰 얼개였다.

KBS ‘웃어라 동해야’도 미국으로 입양된 미혼모 안나(도지원)에게서 태어난 청년 동해(지창욱)가 한국으로 들어와 아버지 제임스(강석우)를 찾는다. 그런데 제임스는 자신의 과거 여자 새와(박정아)의 시아버지더라는 꼬인 가족사가 펼쳐진다. ‘가시나무새’로 부보세대에서 아이를 버린 것으로 인해 자식세대의 심리상태가 극적으로 치닫고 있다. SBS ‘신기생뎐’도 여주인공 단사란(임수향)에게 출생의 비밀이 내재돼 있다.

엇갈린 운명이라는 출생의 비밀은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는 큰 무기다. 막판 반전용으로도 그만이다. 잘 키운 아들이 실제로는 다른 집 자식이더라, 사랑을 했는데 알고보니 남매 사이더라 등의 상황은 드라마의 극성을 끌어올리기에 매우 좋다. 이런 사실을 아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알게 될 때마다 한 번씩 놀라게 된다. ‘웃어라 동해야’는 계속 이런 상황을 이어나가며 갈등과 자극을 유지한 채 이야기를 늘리고 있다.



이런 출생의 비밀은 인생 역전을 강조하는 기제로도 쓰이고 있다. 한순간에 극과 극의 인생으로 변하는 ‘로또 인생’을 그린다는 말이다. 조그만 빵집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알고보니 재벌집 아들이라는 사실은 ‘운명론’과 ‘결과주의’를 반영한다. 현실이 힘들수록 사람들은 이런 운명론적 판타지에 기대게 된다. 이 때문인지 과정을 중시하는 성장드라마는 많이 약화된 상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도 출생의 비밀 이야기는 등장한다. 가족주위와 혈연주의가 유난히 강한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이 등장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하다. 핏줄외에는 믿을 사람이 없는 사회일수록 혈연에 집착하기 마련이어서 출생의 비밀만큼 호기심을 당기는 소재는 없다.

하지만 엇갈린 혈연관계가 드라마를 자극적으로 만들어 소위 ‘막장화’에 한몫했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상황변화의 낙차만 크게 해 자극적으로 만들어 시청률을 끌어올리겠다는 발상은 자극의 역치만 키울뿐이다. 내성이 생기는 시청자를 자극하려면 갈수록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한 법이다. 엇갈린 혈연관계가 극을 풀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장치지만 그것이 인공조미료에 그쳐서는 안된다. 조미료를 많이 쓴 음식을 자주 먹은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칼럼니스트 서병기 < 헤럴드경제 대중문화전문기자 > wp@heraldm.com


[사진=MBC,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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