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든> 송선미, 16년 만에 터진 사투리의 힘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96년 슈퍼엘리트모델로 데뷔한 송선미를 처음 본 것은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송선미가 맡은 다혜라는 캐릭터는 춘희와 철수가 함께 쓰는 시나리오 속의 인물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물론 송선미의 영화는 아니었다. 심은하가 얼마나 대사를 캐릭터에 맞게 갖고 노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였다. 심은하가 맡은 영화 속 춘희는 투박하면서도 사랑스럽고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반면 춘희와 철수가 쓴 시나리오 속의 여주인공은 정반대였다.

날씬하고 키가 크고 목이 길고 이목구비는 반듯한 송선미는 미술관 안에 서 있는 마네킹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움직임 또한 마네킹과 비슷했다. 그녀가 내뱉는 대사들 또한 시나리오에 쓰인 대사를 그대로 읽는 것처럼 건조했다. 안성기가 시나리오 속 인물 인공을 연기하면서도 보여준 부드러움과는 또 대조적이었다.

그 결과 이 영화 속에서 송선미는 하나의 풍경으로 작용할 뿐 배우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였는지, 다혜라는 인물에 대한 배우의 캐릭터 분석이었는지, 아니면 배우 자체가 보여준 연기의 어설픔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송선미가 보여준 <미술관 옆 동물원>의 다혜는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 후로 드라마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수현의 <부모님 전상서>를 비롯해 여러 주말극에 자주 등장했던 그녀는 언제나 부잣집 외동딸 같은 이미지였다. <목욕탕집 남자들>의 김희선이 조금 철든 모습 같은 캐릭터들 말이다. 말은 많고 가끔 할 말은 다하지만 그래도 알고 보면 싹싹하고 부모님이나 시어머니에게 잘하는 도시여자 캐릭터. 그 인물들을 표현하는 송선미는 나쁘지 않았지만 인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송선미에게는 늘 특유의 표준어 어조가 있었는데 아마 그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사를 읽을 때 언제나 또박또박 정확하게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발음도 센 편이라서 감정이 없고 대사만을 힘주어 연기하는 모습으로 여겨졌다.



그 후, 송선미의 연기가 의외였다고 느낀 작품이 있었는데 바로 홍상수의 <북촌방향>에서였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도 역시 드라마에서와 마찬가지로 딱딱하고 똑 부러지는 대사처리를 한다. 하지만 그 대사와 대사 사이, 잠시 쉬어가는 부분에서 의외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서 송선미가 맡은 보람은 교양 있는 인물이지만 알고 보면 속물스러운 면모가 있는 캐릭터다. 송선미는 보람의 대사가 아니라 표정과 웃음에서 그런 속내를 빤히 드러낸다. 하지만 그건 오롯이 감독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홍상수 감독이라면 그 배우가 평소 연기하던 캐릭터를 뒤집어서 그 뒷모습을 아이러니한 날 것으로 보여주는 사람으로 유명하니 말이다.

하지만 최근 <골든 타임>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 드라마에서 송선미는 자신이 맡을 수 있는 최적의 캐릭터 신은아를 만나서 너무나 편안하게 연기한다. <골든 타임>에서 외상팀 코디네이터인 신은아는 지극히 평범해서 사랑스러운 성격이다.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그 사람 괜찮다, 라고 여겨지는 인물 말이다. 드라마에서 이런 인물은 강하게 도드라지는 면이 없기에 밋밋해지기 쉽다. 하지만 송선미는 이 캐릭터를 <골든 타임>에서 가장 살아 있는 캐릭터 중 하나로 만들어놓았다.

무슨 까닭인지 신은아의 대사 하나하나에 감정이 묻어나게 하는 방법을 이 배우는 터득한 것 같다. 게다가 최인혁 의사를 흘겨보는 표정, 살짝 눈웃음치는 모습까지 전부 자연스럽다. 지극히 인위적으로 여겨졌던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의 다혜와 달리 이 드라마에서의 은아는 우리 옆에 있는 친근한, 그래서 더 빛나는 인물이 된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점은 표준어가 아닌 부산 사투리로 연기하는 그녀가 가장 자연스럽게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특히 사투리로 연기하는 다른 여배우들의 클리셰인 억세고 코믹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더 좋다. 드라마 속 신은아의 사랑스러우면서도 은은한 사투리는 언제나 급박하고 숨차게 돌아가는 의학드라마 <골든 타임>에 여유를 주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송선미에게 부산사투리를 쓰는 평범한 신은아와 같은 캐릭터를 맡길 생각을 한 작가나 프로듀서는 왜 아무도 없었을까? 언제나 도시적이고 커리어우먼이면서 부잣집 딸 같은 드라마적 용도로 만들어진 캐릭터들만이 주어졌을까? 그 안에서 배우 역시 늘 똑같은 패턴으로 연기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어찌 보면 드라마 <골든 타임>의 신은아는 송선미가 처음으로 시나리오 안의 인물에서 벗어나 배우 스스로 캐릭터를 만들어갈 수 있는 인간적인 역할인지도 모르겠다. 송선미는 이제야 겨우 그녀를 묶어놓았던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빠져나온 셈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영화 <북촌방향>]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