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순옥 작가, 다섯손가락으로 유혹하려면..
- 김순옥 작가로 본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의 차이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김순옥 작가의 히트작 <아내의 유혹>에서 구은재가 점을 찍고 민소희로 변하는 장면은 아주 중요하다. 이 장면 하나로 김순옥 작가의 모든 능력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일일드라마에서 스피드란 중요하지 않았다. 대개의 모든 일일드라마들은 사랑하다, 밥 차리다, 훈계하다, 울다, 사랑하다, 웃다, 밥 차리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일일드라마의 갈등은 서서히 불타오르다 오래도록 끌면서 이어졌고 마지막에 가서야 화해로 마무리 되었다. <아내의 유혹>은 보통 일일드라마의 25회 분량을 25분짜리 일일드라마 안에 전부 집어넣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갈등과 사건과 해결이 반복되었다. 매일매일 전개되는 사건 속에서 시청자들은 숨 돌릴 틈 없이 빨려 들어갔다.

이렇다 보니 드라마 속 상황들의 논리적인 연계성은 종종 무너졌다. 점 하나 찍고 민소희로 변신한 구은재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점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모든 구구절절한 상황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구두점이기도 했다. 점찍고 끝, 이제 2막 시작합니다. 등장인물 대부분의 감정선 역시 아주 단순한 구조였다. 하지만 그 단순함에 탄력 받아 인물들은 재빠르게 화내고, 울부짖고, 해결하고, 다시 음모를 짜고, 누군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고로 다른 일일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답답해서 화병에 걸릴 것 같은 인물이었다면 <아내의 유혹>의 인물들은 금방이라도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아내의 유혹>은 이처럼 기존의 일일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패턴의 재미를 주었다. 비디오테이프를 빨리감기 할 때 영화 속 등장인물의 움직임이나 목소리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그런 재미였던 것이다. <아내의 유혹>을 볼 때 시청자들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 그저 사건의 재빠른 진행 속에 희극적인 즐거움을 맛볼 따름이다. 즉, 시청자들은 <아내의 유혹>의 속도감에 드라마로서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미덕쯤은 신경 쓰지 않아도 용서가 되는 것이다. 25분 동안 재미있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25분 분량의 일일드라마와 60분 분량의 주말드라마에서의 호흡은 다르다는 것에 있다.

김순옥 작가는 SBS에서 두 편의 주말드라마를 썼다. 한 편은 시청률과 작품성 면에서 실패한 <웃어요, 엄마>였고 두 번째 드라마가 현재 방영 중인 <다섯손가락>이다. 클래식음악의 세계와 어머니와 양아들 사이의 애증을 다룬 이 드라마는 그 기획 자체는 그럴 듯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소재가 맞물려 흥미로운 욕망의 연주를 들려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김순옥 작가는 드라마 <다섯손가락>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60분짜리 드라마에서 점하나 찍고 모든 게 달라졌어요, 로 쉽게 시청자들을 설득하기란 힘들다. 물론 60분이란 시간 동안 시청자들은 드라마 안의 사건들을 모조리 분석하고 따져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건과 사건이 맞물리는 연계성, 인물과 인물 사이의 감정선이 파도치는 흐름, 그리고 대사의 맛깔스러운 맛만은 아주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김순옥 작가는 이 모두를 살리고 있지 못하다.

드라마 <다섯손가락>은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에서처럼 사건 진행이 빠른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 보니 어이없는 빈 공간이 너무나 빤히 드러난다. 클래식계의 김연아라는 유지호를 역시 피아니스트가 꿈인 홍다미가 얼굴조차 모른다는 사실. 화재가 일어났을 때 엄마 채영랑이 친아들인 유인하보다 양아들 유지호를 먼저 구해준 일을 채영랑이 10년 넘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 이유가 토끼잠옷 때문이라는 말을 해줌과 동시에 과거의 모든 분노가 빛의 속도로 사라진다는 사실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이 드라마의 화면은 상당히 고급스럽고, 주인공 채시라의 연기는 너무나 진지해서, 작가가 드라마의 사건을 제대로 구성하지 못했다는 대비효과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등장인물 간의 감정선 역시 마찬가지다. 60분짜리 드라마에서 인물과 인물 간의 감정은 살짝 질질 끄는 맛이 있어야 한다. 인물의 내면 역시 조금씩 감질나게 드러나야 제 맛이다. 그 사이사이에서 시청자들은 그 인물에 감정이입도 했다 다른 인물들을 욕하기도 했다 하는 것이다. 김순옥 작가는 인물끼리의 관계나 인물의 내면에 너무나 무심하다. 아마 일일드라마를 쓸 때에 그러한 부분을 군더더기로 여긴 듯하다.



하지만 때로 주말드라마에서 군더더기란 오히려 시청자들을 잡아끄는 데에 한몫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노년의 작가 정하연이 <욕망의 불꽃>에서 보여주었던 필력이기도 하다. <욕망의 불꽃>은 거의 도돌이표 식으로 이야기들을 질질 끌었지만 그러면서도 시청자들의 눈을 잡아끄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건 바로 모든 인물들이 내면에 각기 다른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또 인물들끼리 부딪치는 순간의 감정선을 작가가 쥐락펴락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대사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다섯손가락>의 대사는 너무 즉물적이고 뻔하다. 김순옥 작가는 원래 대사를 잘 쓰기보다 사건을 스피드하게 끌고나가는 데에 승부를 거는 작가이다. 하지만 60분짜리 드라마에서 대사의 맛이 살아 있지 않으면 그 드라마는 영혼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다섯손가락>에는 세계의 모든 명장이 모여서 만든 세계에서 하나뿐인 최고의 피아노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피아노의 외관은 컬러플하고 장식이 많아 처음에는 현란하게 보이지만 오래 보면 볼수록 피아노라기보다 고철덩어리처럼 여겨진다. 김순옥 작가는 현란하고 스피디한 사건 진행 솜씨로 25분짜리 일일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하지만 60분짜리 드라마에서 그 장점은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김순옥 작가에게 이제 또 다른 연주법이 필요할 때다. 점점 느리게, 점점 여리게, 하지만 강렬한 순간은 놓치지 않고 점점 빠르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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