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책과 드라마의 확연한 차이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누구나 다 만화책과 함께한 깊은 밤의 추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잠들기 전 이불 덮고 부모님 몰래 들춰보던 그 흥미진진한 세계를 말이다. 졸음으로 자꾸만 눈이 감겨도 만화책 속 꽃보다 멋진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책장을 넘기면 어느새 머릿속은 전구가 켜진 듯 또릿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반만 읽고 덮고 나머지는 다음날 수업시간에 몰래 읽으려던 한 권을 어느새 다 떼게 된다. 그런데 친구에게 다음 권을 빌리지 않은지라 어떤 스토리가 이어질지 궁금한 마음에 잠은 또 오질 않는다. 당연히 늦잠 때문에 다음 날은 보나마나 지각이다.

만화책은 정말 신기한 책이었다. 만화책 속 종이나라 사람들은 어찌나 멋있고 어여쁜지, 아무리 닭살 돋는 대사를 날려도 그게 다 그럴듯해 보였다. 종이나라의 사건들은 깊게 파헤치면 말이 안 되도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읽다 보면 어느새 깊숙하게 빨려들어 갔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종이나라의 이야기라서 가능한 일이다.

만약 이 만화 속의 모든 요소들이 안방극장으로 고스란히 옮겨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밤새 책장을 넘기며 종이나라 사람들과 꼴딱 시간을 보내던 샤랄라한 기쁨을 되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실험과정을 지금 체험하고 있다. 최근 방송국 3사의 수목드라마 <아름다운 그대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착한남자>, <아랑사또전>은 모두 드라마보다는 어딘지 낡은 만화책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우선 시각적으로는 만화책의 느낌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일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세 드라마의 주인공들 모두 종이나라의 인물들을 쏙 빼닮은 외모의 남녀들이다. 드라마의 화면 역시 오히려 만화보다 더 만화처럼 색감이 잘 빠져 있다. 그렇다면 이건 생생한 만화책을 보는 것처럼 즐거워야겠지만 어째 기분은 그렇지 않다.

우선 SBS의 <아름다운 그대에게>는 일본의 원작만화 <아름다운 그대에게>를 원작으로 했으니 틀이 만화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세 드라마 중 가장 만화책에 가까운 드라마다. 이 만화는 일본에서도 대만에서도 드라마로 각색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판은 대만이나 일본판보다 화면의 구도나 인물들의 행동이 훨씬 더 만화적이다.

아름다운 그림 같은 주인공들이 나오니 십 분쯤 보기는 즐겁지만 삼십분쯤 보고 있노라면 이내 눈이 피곤해진다. 사실 사람들이 만화 원작 드라마에서 기대하는 것은 만화책에서 더 나아간 만화적인 과장이 아니라 바로 만화적인 요소의 비중을 줄이고 내 옆에서 벌어지는 사건 같은 현실감을 더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그대에게>는 현실감을 버리고 만화적인 요소를 오히려 한 샷 더 추가했다. 형형색색 설탕물처럼 달디 단 이 드라마의 결과는? 시청률이 말해준다.



MBC의 <아랑사또전> 역시 원작은 아랑설화이지만 극의 구도는 만화에 가까워 보인다. 특히 이 드라마를 보다보면 80~90년대 유행했던 명랑만화나 시대만화의 요소들이 간간이 보인다. 요괴들의 이야기는 <머털도사>가 떠오르고 사또 이야기 역시 당시 많이 유행하던 시대극 만화들의 느낌이 있다. 그래서 <아랑사또전>은 옛날식 만화를 읽듯 어딘가 향수를 불러오는 잔재미가 있다. 문제는 옛날식 만화의 교훈담까지 닮아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인물들의 감정선 역시 너무 어려 보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만약 <아랑사또전>이 어린이날 2부작 특집극이었다면 상당한 수작이 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늦은 밤 10시에 보여주는 드라마로는 그 힘이 약하다. 똑같은 판타지사극이었던 <해를 품은 달>처럼 사랑담을 힘 있게 몰아붙이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이 드라마가 현실감을 갖는 이유라면 사또 은오를 맡은 이준기의 대사구사력에 있다. 사또는 전형적인 종이나라의 인물이지만 이준기의 대사는 드라마의 주인공에 온기와 활력을 입혀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드라마를 모두 이끌어가기에 <아랑사또전>은 여전히 심심한 드라마다.

허영만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각시탈>의 후속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역시 원작은 없지만 익숙한 만화의 패턴이다. 특히 80년대 한국판 순정만화를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80년대 한국 순정만화에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룬 심각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리고 송중기처럼 꽃미남이면서 순정파에 고독해 보이는 남자주인공이 주로 등장하고 그런 인물들이 내뱉을 만한 대사들이 말풍선 안에 가득했다. 그때는 그 무겁고 살짝 겉멋 든 대사들이 거슬리진 않았다. 종이나라의 인물들이란 원래 고독해 보일수록 멋져 보이는 법이니까.



하지만 종이나라의 인물이 아닌 살아 있는 배우들이 그런 대사를 칠 때 우리는 당황스럽다. 멋있기보다 가끔은 이상한 방향으로 우스워지니 말이다. 그래도 80년대 순정만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는 그 책장만은 재빠르게 휙휙 넘어간다. 다만 그 시대의 만화처럼 뜬금없는 사건들이 설명 없이 튀어나왔다 금방 사라져서 문제지만.

세 드라마를 보면 만화책과 드라마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종이나라의 사건들은 보는 사람이 직접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읽다가 지겨우면 빨리 넘기고 마음에 드는 장면은 천천히 볼 수 있다. 또한 황당한 이야기들도 만화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릴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우리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하며 볼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잘생기고 예뻐도 종이나라의 사람이 아닌 현실의 배우들이 내뱉는 만화적인 대사와 상황들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무엇보다 만화책은 읽다가 지겨우면 베개 위로 던질 수가 있지만 텔레비전을 던지는 건 너무 힘이 든다. 대신 텔레비전에는 리모컨이 있다. EBS로 채널을 바꾸면 세 드라마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흥미진진한 다큐프라임을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좀 더 재미있고 상상력이 풍부하면서 감동까지 있는 작품을 원한다면? 컴퓨터를 켜고 인기 웹툰을 보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시대의 생생한 드라마는 사실 드라마가 아니라 웹툰 안에 모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MBC,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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