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빛프린스> 제작진에 권하는 한 권의 책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우리나라 대중매체에서 책을 대하는 방식이란 고상하고 비밀스러운 노인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책이란 노인은 결코 잘난 척하거나 거들먹대지 않는다. 종이냄새를 풍기는 그분께선 맑은 두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따름이다. 그의 품성은 고결하고 태도는 지극히 점잖지만 내면에는 사실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가 숨어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를 대하는 진행자들은 어떻게 이 분을 대해야할지 몰라 말문이 막히며 식은땀이 난다. 그리하여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 이 분은 워낙 고상하셔서 사람들을 무시하는 걸 거야. 도대체 왜 이 분은 이렇게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당황하게 하는 걸까? 이 분과 대화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일 테지.’

책 관련 교양 프로그램은 그래서 대부분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가끔 진행자가 농담 한 마디를 던지면 패널들은 따라 웃으면 안 된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허허 웃는다. 잠시 정적이 이어지고 시청자들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지루한 이야기가 또 이어진다. 물론 평범한 대화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전문용어도 섞을 필요가 있다. 책이란 까다로운 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조금의 가벼움이나 일탈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아마 KBS <달빛프린스>의 제작진은 책과 관련되어 좀 더 즐겁고 활기찬 프로그램을 꿈꿨던 것 같다. 엄숙하게 가기보다 책을 통해 교양과 즐거움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단숨에 잡을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 하지만 교양과 즐거움이란 토끼가 껑충껑충 제멋대로 뛰어다니는 추세라 <달빛프린스>는 상당히 정신사납다. 이 정신사나움은 <라디오스타>처럼 경쾌한 정신사나움이 아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달프들은 즐겁기보다 불안해 보인다. 무엇보다 강호동 달프를 필두로 한 달프들이 진행하는 <달빛프린스>에서의 책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다. 그들은 책을 어떻게 대할지 몰라 오히려 더 들떠서 웃기려고 애쓴다. 물론 그들이 내뱉는 어수선한 농담은 프로그램 내내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하지만 달프들과 달리 이 프로그램의 게스트들은 오히려 차분하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시청자들에게 제법 잘 전달되는 편이다. <달빛프린스>는 특이하게도 다른 토크쇼와 달리 진행자보다 게스트가 프로그램을 끌어간다는 인상이다. 사실 달프들과 게스트의 차이는 책을 읽고 안 읽고의 차이는 아니다. 차이점은 게스트들은 이미 책과 호흡했던 사람들이고 달프들은 책의 겉만 훑어본 이들이라는 데에 있다.



책을 읽는 행위란 단순히 눈으로 문자를 읽고 그 내용을 암기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어마어마한 교훈을 깨닫기 위해 작은 글자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겨 넣는 훈련도 아니다. 독서란 다른 세계를 머리와 가슴으로 호흡하는 일이다. 갇혀진 공간에 살던 우리는 넓은 숲에 발을 디뎠을 때의 그 짜릿하고 상쾌한 호흡을 기억한다. 그것은 우리를 무척 즐겁고 들뜨게 한다. 독서의 행위란 그러하다. 무엇보다 새로운 지식과 상상과 감수성의 공기를 맘껏 즐기며 산책하기.

이 프로그램의 게스트들은 자신이 가지고 온 책을 호흡하며 즐겨본 이들이다. 반면 달프들은 선정된 책을 눈으로만 훑었을 뿐, 아직 즐기지 못한 이들이다. 당연히 이 프로그램은 책을 매개로 한 패널들의 속이야기가 나오기가 힘들다. 대신 퀴즈를 통해, 더군다나 팔에 수갑 비슷한 것을 채워서, 그들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아닌지를 평가한다.

그런데 과연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건 어떤 걸까? 과연 독서에 정답이 있을까? <꾸뻬 씨의 행복여행>을 통해 모두들 그 책에 나온 그대로의 행복을 외우는 것은 행복일까? 오히려 우리는 수많은 시험을 위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을 암기하기 위해 책에서 정답을 찾기 위해 독서를 했기에 책이 진절머리가 났던 것은 아닐까?

<달빛프린스>는 슬프게도 책을 통해 시청자를 행복한 달빛의 세계로 데려가지는 못한다. 즐거움을 주려하지만 정작 그 방식은 시청자를 토끼장 같은 답답한 교실로 몰아간다. 너 정답을 모르는구나, 그러면 두 팔 번쩍 들고 벌을 서거라. 그 방식 안에 어떤 유머감각이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물론 <달빛프린스>에 희망이 없지는 않다.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책을 제대로 대하는 달프는 의외로 용달프가 아닐까 싶다. 용달프는 책에 대한 불편함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그는 책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읽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책을 통해 자신의 안에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특히 이보영과 출연했던 <꾸뻬 씨의 행복여행> 편에서 그런 면은 더 도드라졌다.

배우 이보영의 <꾸뻬 씨의 행복여행> 다음에 출연한 남자 게스트들이 들고 나올 책은 <슬램덩크>라고 한다. 그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슬램덩크를 읽지 않은 남자들이란 아마 거의 없을 것이고 그만큼 <달빛프린스>의 달프들도 책에 대해 혹은 그 책을 읽는 자신에 대해 훨씬 자유롭고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책이든 책이든 그게 무슨 상관. 어쨌든 깊게 호흡했던 책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이 재미가 없다면? 그렇다면 <달빛프린스>의 제작진은 책을 즐기는 방식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위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추천도서는 프랑스 소설가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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