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태민 “날 것의 리듬까지 연습하고 싶진 않다”[인터뷰]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돌직구 인터뷰] ‘어디서 봤던 배우지?’ 한참을 생각했다. 궁금했다. ‘왜 이런 보석이 어디서 뭐하다가 나타났는지’ 묻고 싶었다.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가며 대화의 키를 흔든 ‘조지’ 전문 배우 정태민을 만났다.

-대학로 작품은 거의 챙겨 보는 편인데 왜 몇 년간 볼 수 없었던 건가?
“2002년 <점프> 초연부터 함께 했던 멤버입니다. <난타>도 오래 했었고요. 한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아서 낯이 익지 않았을 수도 있겠네요.”

-유학을 다녀 온 건가.
“유학까진 아니고, 호흡법을 다시 배우고 싶어 테너 조용갑 선생님에게 잠시 성악을 배우고 왔어요. 2009년도에 <러빙유>(원제 : Why not stay for breakfast?)란 작품을 류현미 연출과 작업했는데, 당시 류연출이 절 보고 ‘호흡이 떠 있다’는 말을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호흡을 내릴 수 있을까? 차분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 성악레슨을 받게 됐어요.”

■ 내 삶은 ‘조지’ 그 자체

현재 배우 정태민은 대한민국 최초 관객 참여형 연극 <쉬어매드니스>에서 미워할 수 없는 무한 발랄함과 똘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미용사 조지역에 출연중이다. 배우 김철진과 더블 캐스팅됐다. <쉬어매드니스(Shear Madness)>는 미용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네 명의 용의자 중 범인을 잡기 위한 추리과정을 담은 극. 형사들이 사건의 목격자인 관객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관객과 배우가 하나가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범인을 찾아가는 연극이다.

-뽕짝 뮤지컬 <군수선거>와 <쉬어매드니스>에 동시에 출연하느라 바쁘겠다.
“2월부터는 <쉬어매드니스>에만 출연합니다. 어제 <군수선거> 자체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왔어요. 재미도 있고 뜨거운 눈물도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류현미 연출도 보고 가셨는데 ‘이제 <러빙유>에 다시 출연하면 잘하겠네’라고 칭찬해주셨어요. 같은 직업을 가진 배우라 상대를 잘 칭찬하지 않는 아내도 ‘남편 칭찬하느라 주위에서 손가락질 받을 지경’이라고 할 정도예요. (웃음) 제가 출연하지 않더라고 꼭 한번 보러 가셨음 좋겠어요.

-극 중 ‘조지’와 실제로도 많이 담았는가
“제 삶이 ‘조지’ 그 자체입니다. (웃음)발랄하고 재미있죠. <러빙유>에서도 ‘조지’로 출연했구요. <쉬어매드니스>도 ‘조지’로 시작했구요. 그 뒤에 ‘형사’ 역까지 하게 됐어요.”

-왜 갑자기 역할을 바꾸었는가
“역할을 바꾼 게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당시 서성종 배우가 형사 역할을 하던 때 였는데, 더블 캐스팅 된 다른 배우가 올라가지 못해 홀로 힘들어하고 있었어요. 좋아하는 동생 생각이 더 컸던 거죠. 그래서 하루는 ‘조지’, 또 하루는 ‘형사’역을 번갈아가면서 했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작품을 여러 개 뛰는 건 가능해도, 물론 바람직한 것 아니지만요. 한 작품 안에서 여러 역할을 돌아가면서 맞는다는 건 정말 힘들더군요. 그래서 계약 끝나고 도망 아닌 도망을 갔어요.”

-4년 만에 <쉬어매드니스>로 다시 돌아오니 어떤가?
“이 작품은 스스로 발가벗겨지는 느낌을 많이 받게 돼요. 쉽게 덤빌만한 작품이 아닌거죠.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이유는 출연배우가 아닌 관객으로 <쉬어매드니스>를 보러 갔는데 후배 김나미(극중 수지 역)가 너무 연기를 잘 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엔 정말 살인자 같은 데 능청스럽게 잘 하고 있더군요.”



■ 변정주 연출과 함께 살던 고향 <쉬어매드니스>

1980년 보스턴에서 초연된 연극 <쉬어매드니스>는 보스턴 글로브의 '올해 최고의 코미디', '올해 최고의 연극'으로 뽑히기도 했다. 또한, 미국 역사상 가장 롱런한 연극으로 기네스북 세계 기록에 올랐다. 살인 사건을 다루는 추리극이긴 하지만, 순간 순간 돋보이는 배우들의 센스와 순발력, 허를 찌르는 애드립으로 매일매일 결말이 달라진다.
특히, 정태민 배우와 변정주 연출가에겐 ‘고향 같은 연극‘이다. 두 연극인 모두 “고향 같으면서도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며. “연극의 기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쉬어매드니스>는 배우에게 얼마나 힘든 작품인가?
“ (공연러닝타임)두시간 동안 살인자로 지내는 건데 심리적 스트레스가 엄청나죠.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전 살인자가 아닙니다’라고 연기하는 거 잖아요. 그렇다고 단순한 코미디로 풀어내서는 안 되는 작품이구요.”

-변정주 연출과 부딪치는 지점도 있었을 것 같다.
“‘저는 ‘안 죽였다’는 전제하에 부정하는 에너지로 풀어내려 했어요. 하지만 변 연출님은 실제 살인을 했다는 전제하에 용의자들이 태연하게 ‘전 안했어요’라고 거짓말하기를 바라는 거였어요. 4년 전만 해도 연출님의 말을 100% 다 이해하긴 힘들었어요.”

-그렇다면, 잠시 공연계를 떠나 있으면서 뭔가 깨달음이 온 건가
“30대를 지나고 아이 아빠가 되면서 생각의 변화가 왔어요. 이전엔 ‘당신과 나는 틀려’란 생각이 들면 상대에게 도망치는 편이었어요. 지금은 ‘세상에 틀린 게 어딨어. 다른 거지’라며 상대의 말을 인정하고 갑니다.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가니 그 전까지 불편했던 것들이 많이 없어졌어요.”

-나이를 먹고 ‘조지’의 캐릭터 해석도 달라진 건가
“전엔 스스로를 의심했어요. 어떻게 실제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연기하라는거지? 그 심리적 압박을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다 알게 됐어요. ‘마인드 컨트롤, 털어내기’를 몰랐던 거죠. 그동안 내가 부족했구나. 공연의 밀도에 대해 깨달았죠. 모두가 살인을 하고 와서 그것을 아닌 척 풀어내는 과정을 어떻게 소화해내느라에 따라 ‘밀도’가 생기는 거였어요.”

-이젠 ‘조지’로 무대에 서는 게 좀 더 편해졌겠다.
“심리적 스트레스는 많이 줄었죠. 그럼에도 힘든 연극은 분명해요. 벌써 입술에 물집이 잡혔어요. 힘들면 제 몸이 바로 반응을 하거든요. 나이를 먹었더니 생각은 커졌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경우가 많아요.(웃음) 저희 작품 워밍업 시간 있잖아요. 젊었을 적엔 다 됐는데 이젠 잘 안 되는 장면이 그 부분입니다. 연출님은 음악의 흐름에 따라 몸이 다 반응하길 원하시는데 표현이 안 돼요. 그냥 음악을 듣고 싶어서 ‘어기적 어기적’ 움직이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연출님의 디렉션이 들어옵니다.”



■ ‘곧 뭔가 할 거 같아’란 이유로 매번 오디션에서 낙방하던 배우

배우 정태민의 현재 나이는 서른 일곱. 10년이 넘게 배우생활을 하면서 넌버벌 작품 외에도 <짬뽕>, <라이어>등의 연극에 출연했다. 서울예대를 졸업하자마자 배우로 무대에 섰지만 매번 오디션에 낙방했다. 연극 뿐 아니라 영화 오디션에서도 번번이 퇴짜 맞았다.

-나이가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출연작이 많지 않다.
“2002년에 오태석 선생님이 계시는 극단 ‘목화’를 들어갔지만 2작품 밖에 하지 못했어요. “탈춤에 매진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극단 ‘목화’를 나왔죠.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서성종, 김나미, 박건형, 류승룡 배우가 서울예술대 ‘탈춤반’ 출신입니다. 이십대 내내 <점프>,<난타> 공연을 했어요. 그러다 서른에 대학로로 나왔어요. 맨땅에 헤딩하듯 다시 시작한거죠.”

-나이 서른에 대학로 배우로 온 이유는 뭔가
“이십대엔 오디션 보는 것마다 떨어졌어요. 이유도 여러 가지 였어요. ‘동안이라서 안된다’, ‘평범하게 생겼다’, 또 다른 쪽에선 ‘일반인처럼 안 생겼다’란 이유로 퇴짜를 놓더군요. 그러던 중 ‘남자배우는 서른이 돼야 한다.’고 선배들이 말했어요. 그래서 기다렸죠.”

-그 뒤론 여러 곳에서 많이 불러 줬는가
“오디션 합격률이 높아지긴 했어요. 한편으로 전 낀 세대인 것 같기도 해요. 이종혁, 김수로 선배처럼 서른 전에 유명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다행히 류승룡 배우가 뒤늦게 깨고 나왔죠. 그걸 보며 한번 더 기다려볼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선배들이 ‘이젠 남자 배우는 마흔부터야’란 말을 하기도 했구요(웃음)”

-연극 뿐 아니라 영화에도 간간이 출연하고 있는지
“전 영화판에서 안 불러줘요. 화면에 얼굴이 걸린다는 이유로요.”

-화면에 얼굴이 걸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제가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이기 보단 외국인처럼 보이나봐요. 인사동에 나가면 매번 영어로 말을 걸 정도죠. 그리고 게이 역할이나 원조교제하는 남자 배역은 들어와도 일상을 표현하는 단편영화엔 어울리지 않나봐요. 주인공도 아니고 주 조연으로 배역을 받으려고 해도, 쉽지가 않아요. 쓸데없는 역할인데 관객의 시야를 멈추게 하는 얼굴이래요. 저 배우 ‘곧 뭔가 할 거 같아’ 이런 인상을 주는 얼굴이란 뜻이죠. 다행이 나이를 먹고 나니, 연극 무대에서는 이런 마스크가 어필이 가능하네요.(웃음)”

■ “날 것의 리듬까지 연습하고 싶진 않다.”

인터뷰 내내 조지의 리드미컬함을 놓치지 않던 정태민은 연기론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서 사뭇 진지해졌다. ‘무대에서 라이브로 부딪쳤을 때 나오는 진짜 에너지의 묘미’가 훼손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였다.

“죽어라 연습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날의 바이오리듬까지 만들어 연습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매일 매일의 다른 리듬감을 내 것으로 가져오는 게 공연인데, 그 날 것의 리듬감까지 연습한다는 건 아니라고 봐요. 물론 자기 그림도 없이 공연하면서 무턱대고 만들어가는 그런 공연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연출의 그림 안에서 상대 배우와 부딪쳐 나오는 진짜 에너지가 좋아요.”

‘배우로 무대에 서는 것’과 ‘아빠로서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새해 목표라고 말하는 정태민. 그를 키운 건 팔할이 ‘가장이 된 것’이었고 나머지 이할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무대를 떠나있던 시간’에 있었다. “2002년부터 끊임없이 달려왔어요. 무대에 서지 않을 땐 스태프로 참여하기도 했어요. 누군간 ‘다시 시작하려면 더 오래 걸리는데, 왜 쉬었냐’고 말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론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내 의견을 존중해준 부인에게도 고맙구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어른이 됐나봐요.”

인터뷰를 끝내고 문득, 이 글이 ‘정태민 배우가 마흔 즈음에 다시 읽고 싶어지는 인터뷰 기사’가 되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정다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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