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말’ 김지수 섬세한 연기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김지수는 94년 신은경이라는 스타를 탄생시킨 MBC 드라마 <종합병원>에서 ‘백의의 천사’에 어울리는 간호사 역할을 맡으면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그 후 당대 미인의 대표였던 심은하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M’에서도 심은하의 친구로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이후로도 김지수는 꾸준히 드라마에서 주연급의 인물로 등장했다.

하지만 90년대는 김지수의 시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연기나 외모가 문제가 아니라 90년대의 트렌드가 김지수와 거리가 멀었다. 마른 몸, 긴 머리의 여성스럽고 차분한 분위기, 날카롭지만 쉽게 날을 세우지 않는 자그마한 목소리까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는 보이시하거나 도회적이고 당당한 당시의 트렌드한 여배우들과 거리가 멀었다. 김지수는 간호사가 어울리는 여배우에서 늘 1위를 차지하는 그런 정도의 개성을 가진 탤런트였다.

재미있게도 90년대 그녀의 최고 히트작이자 좋든 나쁘든 그녀의 이미지를 다른 방향으로 틀어준 MBC 일일드라마 <보고 또 보고>에서의 배역 역시 간호사였다. 하지만 <보고 또 보고>의 은주는 과거 그녀가 다른 드라마에서 보여주었던 인물들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보고 또 보고>의 은주는 간호사지만 백의의 천사는 아니었다. 작가 임성한의 드라마답게 여주인공 은주 역시 할 말은 하고 여우짓도 잘하는 그런 여주인공이었다. 거기에 어린 시절부터 언니와 차별대우를 받아 약간의 애정결핍 성향까지 지닌 인물이었다. 이 여주인공을 김지수가 징그러울 정도로 잘 소화하는 바람에 김지수 혹은 은주는 인기도 얻은 만큼 사람들의 비난도 많이 들었다. 깍쟁이 같다는 둥, 은주의 헤어스타일이었던 더듬이머리만 봐도 소름이 끼친다는 둥, 뒤로 여우짓은 다하면서 겉으로는 피해자인 척 군다는 둥. 하지만 이 드라마 덕에 김지수는 94년 종합병원으로 얼굴을 알린 뒤 겨우 4년 만에 MBC연기대상을 수상한다.



그렇게 90년대가 저물었지만 그 후 김지수의 주가가 상승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방송국 3사를 넘나들며 주연급의 인물로 등장했지만 대중들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린 적은 많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다른 모습이 있다는 걸 알려준 곳은 브라운관이 아닌 스크린이었다.

2005년 김지수가 주연을 맡은 영화 <여자, 정혜>가 개봉한다. 청소년기 친인척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우체국 여직원 정혜의 일상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이 영화는 지극히 건조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달리 대사들은 지극히 간소하며 여주인공의 감정표현은 절제되어 있다. 이 여백을 김지수는 드라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화한다. 손짓, 한숨, 의미를 쉽게 알 수 없지만 점점 주인공의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섬세한 표정의 움직임. 그리고 어느덧 영화의 후반부에 이를 무렵 예민한 관객들은 평범한 일상이 내면에 상처를 입은 개인에게는 얼마나 살얼음판처럼 여겨지는지를 정혜라는 인물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김지수의 연기는 그렇게 <여자, 정혜> 전과 그 이후로 나눠진 것 같다. 90년대의 그녀가 작품 속 인물에 충실한 성실한 배우였다면 <여자, 정혜> 이후로는 인물의 내면심리를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그려내는 배우로 변했다.



KBS 드라마 <태양의 여자>는 그런 김지수의 연기가 브라운관에서 가장 돋보인 작품이었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신도영(김지수)은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아나운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흉터처럼 남은 트라우마와 지워지지 않는 죄의식이 있다. 바로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입양아였던 그녀가 부모의 친녀인 윤사월(이하나)을 내버린 것. 하지만 뒤늦게 고아로 자란 윤사월이 등장하면서 신도영이 쌓아온 모든 명예는 무너져간다. <태양의 여자>에서 김지수는 화려한 외면과 초라한 내면을 함께 지닌 채 살아온 인간이 무너지는 그 나락의 흐름을 예민한 피아니스트의 연주처럼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여자, 정혜>를 미처 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김지수라는 배우의 연기가 다시 각인되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제 김지수는 내면에 상처를 지닌 인물을 연기하는 대표 여배우가 된 듯하다. 최근 그녀가 연기하는 <따뜻한 말 한 마디>의 송미경(김지수) 역시 남편의 불륜 더 나아가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 받는 인물이다. 거기에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과거 때문에 어떻게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 또한 더해진다. 아마 다른 드라마에서 이런 타입의 캐릭터는 그악스럽거나 아니면 지극히 신파적으로 흘러가기 십상일 거다.



하지만 <따말>의 하명희 작가가 공들인 캐릭터에 김지수의 연기가 더 해지면서 송미경은 기존의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없던 인물로 우아하게 재창조된다. 남편의 불륜을 알고 그를 용서하지 못하지만 그와 잠자리를 가진 후에 홀로 독백처럼 내뱉는 송미경의 대사는 그래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널 용서 못하면서 너한테 안기는 날 어떡하니? 이제는 이런 내가 혐오스러워. 아직도 널 사랑하는 날, 넌 죽었다 깨나도 모를 거야.”

송미경의 남편 유재학(지진희)은 죽었다 깨나도 모를 그녀의 심리를 시청자들은 알 수 있다. 요란한 흐느낌은 없으나 한 방울의 눈물이 흐를듯 말듯 고독한 표정의 김지수가 송미경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KBS, <여자, 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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