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은 극장인가, 생명의 기운이 있는 신성한 곳인가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논 위를 스쳐가는 바람, 바스락거리며 흔들리는 벼 이삭, 황금빛으로 알차게 익어가는 알곡들, 논에 퍼지는 불꽃, 비와 천둥 같은 자연 그대로의 소리들, 물에 비친 구름이 인간의 몸을 통해 살아 움직인다.

가장 순수하고 위대한 테마, ‘자연’에 도전한 현대무용 대만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 ‘Rice(쌀, 안무 린 화이민)’가 지난 11일 LG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생명의 순환을 한 편의 무용에서 만난다는 건 기대 이상의 감동이었다. 가장 신성하고도 품위 있는 악기인 인간의 몸을 통해 만들어낸 ‘Rice’ 속에는 원시적인 몸의 떨림이 있었다.

무용수들의 테크닉이 아닌 에너지에서 스토리를 읽을 수 있는 휴먼드라마였으며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춤사위의 보고였다.

우선, 단순해서 더욱 아름다운 자연의 법칙과 이미지가 무용수들과 완벽하게 합을 이룬다는 점이 놀라웠다. 대만 출신 비디오 아티스트 오웰 하오잰창(Howell Hao-jan Chang)이 담아낸 자연의 풍광을 배경으로 자연의 순환, 시간의 흐름, 그리고 그와 어우러진 우리의 삶을 느리면서도 힘이 있고, 빠르고도 견고한 움직임들을 통해 조화롭게 풀어냈다.

산과 들, 흙과 물, 그리고 바람을 무대로 옮겨온 'Rice(쌀)'의 절묘한 리듬감도 빼 놓을 수 없다. 현란하거나 요란한 영상이 아닌 또 한명의 무용수처럼 존재하는 영상, 그 속에서 펼쳐진 인간과 자연, 생명과 소멸, 부활의 테마가 객석을 흡인력 있게 빨아들이는 점이 더욱 그러하다.



이 곳은 극장인가. 쌀이 익어가는 논인가. 생명의 기운이 전달되는 신성한 곳인가. TV를 끄고, 컴퓨터를 끄고 모두 이 곳으로 함께 가자고 말 하고 싶어질 정도이다.

'Rice(쌀)'가 공연되는 LG아트센터에는 또 하나의 비밀스런 공간이 만들어졌다. 쌀을 만드는 논의 근본적이 요소들인 바람∙흙∙불∙물∙알곡∙꽃가루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인간의 몸을 통해 구현됐다. 그것도 치명적이게 아름다운 상상력을 건드리면서 말이다. 특히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쌀들이 짝짓기를 하는 장면에서는 ‘삶에 대한 경건한 찬양’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오페라를 종합 예술이라고 칭하는데, 린 화이민의 무용은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종합예술이라고 칭할 만했다. 동·서양인 누가 봐도 낯설지 않은 예술적 보편성을 확보한 그는 동양의 유대인으로 불리는 하카족의 민요에서부터 마리아 칼라스의 오페라 아리아, 말러 교향곡까지 음악을 다채롭게 썼다. 그것도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린 화이민은 1999년 피나 바우쉬, 지리 킬리안, 머스 커닝햄, 윌리엄 포사이드와 함께 「댄스 유럽」이 선정한 ‘20세기의 위대한 안무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1969년 대만의 ‘잃어버린 세대’를 다룬 소설 <매미 (Cicada)>를 발표해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된 유명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문학적 경력은 이후 안무가로 활동하면서도 작품을 구상하고 예술적인 비전을 개념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Rice(쌀)'는 기를 다듬는 무용이었다. 23명의 무용수 모두 특별하게 다가와 온전히 무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중국어권 최초의 현대무용단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Dance Theatre)를 설립 린 화이민은 지난 간담회에서,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은 현대무용, 발레 등을 다 배우지만, 명상, 고대의 호흡 수련법인 기공, 내면의 기를 중요시하는 무술, 몸을 쓰는 무술 등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Rice(쌀)’ 초연은 2013년 대만 타이페이 국립극장에서 공연된다. 린 화이민은 무용단 창단 40주년을 기념하여 아시아인의 문화이자 삶의 방식을 의미하는 ‘쌀’을 주제로 한 새로운 대작을 제작했다. 그는 무용수들과 함께 대만의 쌀 생산지 츠상(池上) 지역을 찾아가 직접 농사에 참여했고, 여기서 받은 영감들로 작품을 만들었다.



서구의 현대무용이 신체를 상승시키는 중력 분할에 집중한다면,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은 하강하는 무용을 선보인다. 그의 작품이 더욱 특별한 이유 중 하나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안무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아시아의 주요 춤들을 다양하게 배워온 그는 1974년 한국 무용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는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 김천홍 옹에게서 궁중무용을, 승무 명인 한영숙 선생에게 승무를 배우기 위해 한국에 머물렀다.

그는 2003년 내한 당시 도올 김용옥 선생과 한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한 달 가량 한국 춤을 배우며 익힌 것은 “호흡이었다.”며, “한국 고전무용은 이 세계에서 아마도 가장 위대한 컨템포러리 아트라고 해야 할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2003년 한국에 처음 소개된 클라우드 게이트의 ‘행초(行草, 서예의 행서체와 초서체를 무용수의 동작으로 표현한 작품)를 관람한 후, 도올 김용옥은 “전통적 가치를 표방한 그의 무대예술이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단순함과 철저성과 흡입력이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편, 대만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은 11일과 12일 LG아트센터에서의 공연을 전후로 싱가포르와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룩셈부르크, 러시아를 비롯해 미국 동부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로 쉴 틈 없이 투어를 이어 갈 예정이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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