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테크놀로지는 아날로그 연극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관객들이 꼭 가야만 하고, 꼭 봐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캐나다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 연출의 연극 <바늘과 아편>이 지난 19일 전석매진으로 LG아트센터에서 막을 내렸다.

<바늘과 아편>은 마약, 술, 사랑 등 다양한 방면에서 바라본 세 남자의 중독과 의존성에 관한 이야기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장 콕토, 20세기 재즈 역사를 바꾸어 놓은 트럼펫 연주자 마일즈 데이비스, 허구적 인물인 캐나다 출신의 배우 로베르 이들의 공통점은 사랑을 잃고 상실을 경험한 남자라는 점.

연극은 ‘상실’을 극복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한 축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사이사이 ‘자유롭게 꿈을 꿀 것’을 이야기하는 연출가의 메시지가 세련되게 직교한다.

마일즈 데이비스와 줄리엣 그레코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 녹음을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던 로베르는 내레이션 녹음 도중 ‘사랑’이라는 말에 목이 메어 더빙을 중단한다. 로베르의 감정적 고통은 아편에 의존하던 장 콕토와 헤로인에 의존하던 데이비스를 상기시킨 것. 로베르는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파리의 한 최면 치료원을 찾아가게 된다.

작품의 제목처럼 콕콕 찌르는 묘한 쾌감이 중독성을 더하는 것은 물론 각성제 역할을 한다. 그렇게 영화에서는 쉽사리 느끼기 힘든 ‘기분 좋은 긴장감’과 함께 기억될 연극이었다.



관객의 놀라운 비주얼 시퀀스와 아날로그 연극의 장점만을 온전히 담아낸 무대는 개막 전부터 화제였다. 육면체에서 3면을 떼어낸 기울어진 큐브 무대는 장면 전환을 물 흐르듯 매끄럽게 해준다. 그 속에서 두 명의 배우는 마치 와이어를 단 채 자유자재로 회전하고 이동을 한다.

영화 이상의 스펙타클 연극이다. 등장인물은 2명, 무대 전환을 도와주는 보이지 않는 스태프는 10명이다.(장 콕토와 로베르는 마르크 라브레쉬가, 마일즈 데이브스는 웰슬리 로버튼슨 3세가 분한다)

공중에 매달린 거대한 큐브가 천천히 회전하면서 마치 영화관의 영사막처럼 다양한 화면을 되비춘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뉴욕의 밤거리, 파리의 재즈 클럽, 별빛 쏟아지는 밤하늘로 변신을 거듭하며 관객들의 눈을 현혹한다면, 장 콕토의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to Americans)’는 공감의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이것만이 아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고통과 재즈 음악은 귓가는 물론 가슴을 파고든다. 여기에 로베르 르빠주의 자전적 이야기인 실연이라는 에피소드들은 관객과의 거리감을 단숨에 줄인다.



첨단의 테크놀로지가 아날로그 연극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한번쯤 궁금해 했을 질문이다. 르빠주는 따뜻한 테크놀로지와 최첨단의 연극이 만났을 때 만들어내는 ‘특별한 교감’에 집중했다. 관극 내내, 연극의 우주를 헤엄치고 있는 그의 한마디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심리치료사를 찾는 것보다 연극이 공연되는 극장을 찾기를 권한다”고.

르빠주는 무대 연출을 위해 동원하는 각종 기술도 이처럼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내게 기술은 새로운 도구에 불과하다. 새로운 재료를 발견한 미술가와 같은 상황일 뿐”이라고 말한다.

르빠주 미장센의 무기는 영상과 테크놀로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히든카드는 연극과 테크놀로지를 ‘완벽한 호흡과 서정’으로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잠시도 지루한 틈을 참지 못하는 현대의 관객들을 진득하게 극장 의자에 앉게 만드는 힘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 안에 펄떡이는 배우의 에너지와 호흡은 훼손시키지 않은 채 연극 속 시간을 이끌고 갔다.



그는 현대 이미지 연극의 연금술사로 불린다. 세계화 시대에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경계를 초월하여 다양성과 혁신성을 추구해온 르빠주는 2007년 50세의 나이로 ‘유럽연극상’을 수상했다. 유럽 내에서 연극을 통해 상호 이해와 교류를 촉진시킨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역대 수상자들의 명단을 보면 피터 브룩(Peter Brook)에서부터 조르지오 스트렐러(Giorgio Strehler),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피나 바우쉬(Pina Bausch), 레프 도진(Lev Dodin) 그리고 노벨문학상 수상자 해롤드 핀터(Horold Pinter)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이후의 연극사를 수놓은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다.

1991년 초연된 ‘바늘과 아편’은 발표 당시, 이 작품이 과연 연극인가 영화인가에 대한 논란 뿐 아니라 연극계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 관객을 마주한 이번 작품은, 연극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 괴물 같은 작품이었다.

비평가 필 존슨이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에 대해, “당신이 들었던 것 중에 가장 고독한 트럼펫 소리 일 것이다. 듣고 울어라!”고 평했다면, ‘바늘과 아편’은 이렇게 평하겠다.

“역사상 가장 서정적인 첨단 연극이다. 보고 느껴라.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 이의 두 손에 이 표를 쥐어주고 싶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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